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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칼럼/불황과 꽃의 착한 유혹

이향란 | 시인

지난 주, 경상북도 안동의 작은 마을에 산수유축제가 열린다고 해서 다녀왔다. 여기저기서 꽃소식이 들리고 목련이 봉오리를 터뜨리기 직전, 늘 바쁘고 사는 게 팍팍해 갈증을 도저히 이겨낼 방법이 없던 참이었다.

당일치기로는 좀 무리이기도 했지만 강행하기로 했다. 고속도로와 국도를 들락날락하며 가다보니 일찍 핀 진달래와 홍매화도 볼 수 있었다.

오후쯤에 도착한 산수유마을은 노란 폭죽이 곳곳에 터져있는 듯 했다. 한편에서는 산수유 꽃을 보려는 듯 마늘 싹들이 연록의 고개를 내밀어 황홀한 조화를 이루었다. 저절로 흥분이 되었다. 눈과 머리, 가슴 모두 말개졌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음이, 그 느꺼움이 새삼 행복의 전율로 번졌다.

경칩에 이어 춘분도 지났다. 꽃샘추위가 마지막 시샘을 하지만 약속처럼 꽃들은 피어난다.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매화...... 온통 꽃의 축제다. 그런데 때는 불황이라 목이 메고 가슴은 서늘하다. 미국 금융위기가 알콩달콩 살던 우리네 가정까지 도둑처럼 찾아 들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어렵다고 한숨이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가게가 문을 닫고 그 여파로 사회 부조리마저 늘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철없이 지천에 피어대는 꽃들을, 그들의 빨갛고 노랗고 희어 눈부신 말들을. 몸까지 살랑대는 저 어처구니없는 유혹을.

일의 속성상 나는 거의 매일 실내에 갇혀 지낸다. 바깥으로 향하는 유일한 창구란 유리창 너머의 반 쪼가리 하늘과 눈높이만큼 쑥쑥 자라 올라온 나뭇가지들이 전부다.

그것들을 보며 일을 하고 간혹은 시를 쓰며 외로워하다가 늦은 밤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지난주처럼 간만에 바깥으로 나왔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정말 또 하나의 세상이 환하게 열려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요즘 같은 봄철엔 굳이 누군가를 불러내지 않아도 홀로 즐겁다. 아울러 봄볕은 가슴 밑바닥의 눅눅한 물기를 마르게 한다.

이처럼 밖으로 나온다는 것, 그래서 한 계절에 푹 빠져 본다는 것은 예기치 못한 나르시시즘을 가져다준다.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 자아와 삶을 멀찌감치에서 뒤돌아보게 한다. 다시 들끓을 수 있는 열정과 눈을 마주치게 한다.

온 천지가 꽃 세상인 이 봄은.
꽃은 벌과 나비만 꾀지 않는다. 삶에 지쳐 나약해진 인간의 심신을 꾀어 정서적 위안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꽃으로 취급되는 8000여 종 중 평생 얼마나 보고 죽을까. 살아있을 때 맘껏 꽃을 즐기자. 유혹에 빠지자. 꽃에는 아름다움, 화려함, 번영, 영화로움 등 긍정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 우리 선조들은 꽃의 상징적 의미에 따라 꽃의 품계나 등수를 매기기까지 하면서 즐겼다고 하지 않던가. 혹자는 이 불황에 웬 꽃 타령이냐고 하겠지만 우울한 기운은 햇빛과 꽃, 즉 자연과 마주치지 않으면 없애기 힘들다.

아무리 바빠도 단 하루, 잠깐만이라도 꽃이 전하는 향기로운 말과 화전(花煎)의 상큼한 맛에 빠져보자.

경주 오유리에서는 등꽃을 말려 금침 속에 넣거나 잎 삶은 물을 마시면 부부 사이가 좋아진다고 해서 신혼부부의 자리 속에 등꽃을 말려 넣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그 등꽃이 지면 봄도 간다. 등나무가 그늘을 건네기 전 불황을 잊게 하는 봄꽃의 착한 유혹에 빠져봄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