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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 딜레마, 거리의 미학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용인신문] 30년 전 중국 둔황에 처음 갔었다. 고비사막이 펼쳐지며 서역으로 가는 실크로드의 관문, 오아시스 도시가 둔황이다. 발이 푹푹 빠지고 미끄러지기도 하는 사막을 걷고 또 걸어 모래산 명사산에 올랐다. 서역 하늘과 사막을 아득히 물들여가는 노을도 보았다.

 

그러다 해 지면 도심으로 돌아와 야외 무도회장을 구경하곤 했다. 극장 앞 조그만 광장에 남녀노소들이 모여들어 밴드 연주에 맞춰 춤을 춘다. 여럿이 군무를 추기도 하고 또 블루스 같은 쌍쌍의 춤을 추기도 한다. 러시아나 몽골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예의 TV 화면 속 평양도 그렇고.

 

그런 무도회를 며칠간 밤마다 구경하며 황량한 사막 가운데 있는 조그만 오아시스 도시에서 인간과 사회와 문화, 그리고 예의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블루스를 추면서 가슴이 닿을 듯 말 듯한 적당한 거리 유지가 그리움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낳고 또 야만이 아니라 문화와 문명을 낳은 거라고. 이런 거리에 대한 실감적 명상을 위해 그 후로도 대여섯 차례 실크로드 사막기행을 해오고 있다.

 

사그라지던 코로나 19 집단전염 불씨가 서로 몸 부비고 소리소리 지르며 춤추는 이태원 클럽발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래 자연스레 둔황의 그 블루스가 떠오른 것이다. 그 적당한 거리와 인간과 문화에 대한 예의가.

 

‘고슴도치 딜레마’란 말이 있다. 한겨울을 좁은 굴속에서 나는 고슴도치들이 추워서 체온을 나누려 너무 가까이하면 서로의 가시 털에 찔리고 멀어지면 춥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서양 실존주의 비조인 쇼펜하우어가 개인의 독자성과 사회성 사이의 거리와 갈등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한 이후 프로이드가 심리학적으로도 사용하며 널리 쓰이는 용어다.

 

고등학교 때 이 용어를 처음 접한 이후 난 청춘의 방황기를 거치며 고슴도치 딜레마를 실감했다. 그대와 나, 그리움의 아득한 거리가 사랑이고 이데아였음을. 그 거리를 없애고 합치된 순간 야만, 짐승처럼 되고 꿈과 이상도 상실했음을.

 

미학과 시학 이론에도 심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란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아름다움이 우러나는 거리다. 대상과 너무 가까우면 감상적이어서 유행가처럼 야하고 추접스럽기 십상이고 너무 멀면 남남처럼 객관적어서 정감이 우러나지 않는다. 허니 대상과 나, 객관과 주관 사이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해야 품위 있고 깊은 아름다움이 우러난다는 것이다.

 

난 시를 잘 쓰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시에 대해 말할 때 이 심미적 거리를 고슴도치 딜레마에 연결해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니 거리를 잘 유지해 독자와도 아름답고 깊이 있게 잘 소통할 수 있는 시를 쓰시라고.

 

어디 시뿐이겠는가. 자신의 개인적 삶의 깊이는 물론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예의 바르고 품격 있게 잘 하려면 적당한 거리가 반드시 필요하단 것을 이 코로나 팬데믹 시국은 잘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틈만 나면 불러내 마시자고 해서 성가셨던 지인들이 “이제 정말 그립다”는 문자메시지를 많이들 보내며 그리움이 살아나고 있다. 사람들이 뜸해진 거리에 야생들이 자연으로 살아나고 있다. 미세먼지 예보도 뜸해 신록도 더 푸르러가고 푸른 하늘도 더 높아가고 있다.

 

벌써부터 애프터 코로나 시대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원전을 뜻하는 BC(Before Christ)를 ‘크라이스트’가 아닌 ‘코로나’로 바꾸자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애프터 코로나 시대에는 많은 것들이 확 바뀔 것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역발상적으로 좋았던 점도 떠올려보자. 하여 너와 나, 자연과 인간의 거리가 적당히 지켜져 예의와 문화, 생태환경이 품격 있고 생생하게 살아나는 시대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