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선거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시험대 위에 올린다. 어떤 이는 지지 정당을 향해 뜨겁게 열광하고, 누군가는 냉소와 분노를 삭인다. 혹자는 최악만은 피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투표소에 들어선다. 거리마다 내걸린 공약은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돼 있지만, 그 이면에서 무엇이 실질적으로 다른지는 좀처럼 또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유권자의 고민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그래서, 누가 내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 것인가.” 용인 수지구는 이 질문이 가장 치밀하게 반복되는 공간이다. 에드먼드 버크가 말했듯 국가는 세대 간의 유기적 계약이지만, 그 계약이 일상의 안정으로 체감되지 않을 때 유권자는 언제든 파기를 선택한다. 지난 10년간 수지의 투표 궤적은 특정 이념에 고착된 지형이 아니었다. 민심은 시대적 조건과 자산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이며, 삶의 질이라는 기준 위에서 끊임없이 재편돼 왔다. 변화의 출발점은 2017년 대통령 선거였다. 전통적 보수 강세 지역이던 수지에서 나타난 선택은 단순한 정권 교체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헌정 질서의 회복과 국가 운영의 정상화라는 ‘상식의 복구’에 대한 열망이 표심에 투영된 것이다. 보수의 본
용인신문 | 성군을 만나는 것은 백성의 지극한 복이다. 역사적으로 주나라 무왕이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초야의 현자를 등용하자 천하의 민심은 자연히 주나라로 향했다. 순임금은 백성 중에서 청렴한 고요(皐陶)를 발탁해 다스리니 불인(不仁)한 자들이 멀어졌고, 탕임금 역시 평범한 농부였던 이윤(伊尹)을 등용해 태평성대를 열었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세상을 바로잡는 도리에 대해 “곧은 자를 들어 굽은 자 위에 놓으면, 굽은 자들이 그로 인해 곧게 될 것”이라 역설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진다는 만고의 진리다. 개봉부 양성 땅 괴리 마을에 살던 허유(許由)는 의(義)를 근거로 도리를 실천하며 살았다. 그릇된 자리에는 앉지 않았고, 정당하게 일해 얻은 음식이 아니면 입에 대지 않았다. 그의 깨끗한 명성이 천하에 알려지자 하루는 요임금이 그를 찾아와 천하를 물려주려(禪讓) 했다. 그러나 허유는 정중히 사양하며 말했다. “그대가 이미 천하를 잘 다스려 백성이 근심 없이 살고 있거늘, 만약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면 내게 필시 허물이 생길 것이니 이는 옳지 않습니다.” 허유는 세속의 유혹을 피해 기산(箕山)으로 도망쳤다. 가는 길에 설결이 급히 가는 이유를 묻자
용인신문 | ‘말을 잘하는 것’은 언제나 사회적 힘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수사학이 학문으로 성립되었듯, 말은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사람과 권력, 그리고 공동체를 움직이는 도구였다. 그러나 말의 힘이 클수록, 그 말이 가벼워질 때의 위험도 커진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말 속에서 오히려 신뢰를 잃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말이 많으면 존재감이 커지고, 정치인이나 권력자의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말이 많아질수록 모순도 함께 늘어나고, 그 말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신뢰는 깎여 나간다. 현명한 사람은 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말을 통해 질서를 세운다. 더 조심해야 할 것은, 말 그 자체보다도 ‘속내를 추측하여 말하는 행위’다. 누군가의 의도를 짐작하고 그것을 공적으로 해석해 유포하는 순간, 말은 설명이 아니라 권력이 된다. 그리고 그 권력은 공동체를 안정시키기보다 흔드는 쪽으로 작동하기 쉽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삼국지 속 조조와 ‘계륵’의 고사를 떠올리게 된다. 한중을 둘러싸고 진퇴양난에 빠진 조조는 군호로 ‘계륵’을 택했다. 이는 포기하기에는 아깝지만, 더 큰 희생을 치르며 지킬 만큼의 전략적 가치도 아니라는 복합적
용인신문 |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하 호칭 생략)이 베네수엘라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를 납치하여 미국 법정에 세웠다. 1989년 12월 20일 파나마를 침공한 미군은 파나마의 실권자 마누엘 노리에가 장군(파나마 방위군 총사령관)을 체포하여 미국 법정에 세웠었다. 노리에가는 사실상 파나마의 통치자였지만 대통령은 아니었다. 36년이 지난 2026년 1월 3일 트럼프는 150여 대의 공군기를 동원하여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일대의 군사시설을 폭격하고 육군 특수전 부대 델타포스를 투입하여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납치했다. 21세기에 벌어진 트럼프의 마두로 납치는 미국이 사실상 신제국주의로 치달리고 있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공공연하게 선포한 것이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 고립주의를 지향하는 듯했던 트럼프는 돈로주의(먼로주의를 트럼프와 합성한 용어)를 표방하며 서반구(남북아메리카 대륙)를 미국의 나와바리(영역)로 못박았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에서 마두로를 제거하고 일단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이 임시대통령에 취임하는 것을 승인했다. 트럼프는 다음 차례는 콜롬비아, 쿠바, 멕시코가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면서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의 병합을 공개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덴
용인신문 | 지방선거가 반년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는 평가의 시간이다. 그래야만 한다. 평가가 빠진 선거는 정치를 타락시킨다. 특히 지방선거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지난 임기 동안 지방정부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못했는지를 따져 묻는 자리가 지방선거다. 잘한 지방정부는 선택받고, 잘못한 지방정부는 심판받는 것. 이것이 정석이고 정수이며,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한국의 지방선거는 오랫동안 이 정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유권자의 선택 기준은 지방정부의 행정 성과가 아니라 중앙정치의 흐름, 대통령 지지율, 정당 구도에 좌우돼 왔다. 지방선거가 ‘지방정부 평가’가 아니라 ‘중앙정부 중간평가’처럼 치러지는 일이 반복돼 왔다. 그 과정에서 지방정부의 책임성은 점점 흐려졌다. 여름철 집중호우로 도로가 잠기고 하천이 범람했을 때, 겨울철 폭설과 빙판길로 시민들이 다치고 출·퇴근길이 마비됐을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재난 대응과 안전 관리, 제설과 배수, 생활 인프라는 지방정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 아닌가? 그런데도 이런 실패가 선거에서 실질적인 평가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지방자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정상적인 지방자치라면 지방정부는 계
용인신문 | 2025년의 대한민국 정치는 분명 위기이자 기회였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 질서의 충격과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은 국가 운영의 근본을 다시 묻는 계기가 됐다. 통치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권력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는 질문은 더 이상 추상적 담론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 국가는 단순한 관리자를 넘어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주체로 소환됐다. 탄핵 이후의 정치는 ‘속도’와 ‘결단’을 지도력의 핵심 덕목으로 다시 부각했다. 혼란의 국면에서 지체 없는 판단과 신속한 실행은 국가 운영의 안정성을 회복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위기 상황에서 주저하지 않는 선택은 책임 정치의 출발점이자 지도력의 존재를 증명하는 최소 조건이기도 하다. 다만 그러한 선택은 분명한 방향과 사회적 맥락 위에서 작동할 때만 신뢰로 축적된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의 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문명의 운명은 도전의 크기보다 그 도전에 어떻게 대응했는가로 결정된다는 통찰이다. 위기는 피할 수 없지만, 대응의 방식은 선택의 영역이다. 탄핵 이후의 대한민국 정치는 바로 그 선택의 장 위에 놓여 있다. 정치는 언제나 욕망을 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