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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사람

‘양복장인’ 자존심 만큼은 여전히 청춘

김종학 문화라사 대표

 

용인의 유일한 양복점인 문화라사 김종학 대표는 64년 외길 인생을 걷고 있는 현역 패션계의 산증인이다.

 

 

 

한국 패션계 산증인… 64년간 양복일
1950년대 10대 시절에 입문 주경야독
서울 명동 양복점 취직 실전 감각 익혀
1970년 중앙시장 안에 문화라사 오픈
용인 유일의 ‘수제 맞춤 양복점’ 명성

 

[용인신문] 용인에 그 많던 맞춤 양복점은 다 어디로 갔을까. 80년대만해도 용인 처인구 중앙시장 근처에 22개의 양복점이 성업을 이뤘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기성복이 완전히 자리잡으면서 한 개 두 개 사라지기 시작해 90년대 후반정도가 되면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현재는 ‘문화라사’만이 유일하게 남아 수제 맞춤 양복점의 맥을 잇고 있다.

 

문화라사 김종학(78) 대표는 64년을 한결같이 맞춤 양복 외길 인생을 살고있다. 문화라사는 1970년대에 용인에서 가장 핫한 장소였던 현재 중앙시장 입구 시장약국 위치에 자리잡고서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용인의 양복 문화를 선도하며 수많은 고객의 발길을 붙잡았다. 하루에 33벌의 양복 주문이 쏟아질 정도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87년도에 그 자리에 새롭게 건물이 들어서면서 김 대표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처인구청 방향으로 150미터 정도 올라온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34년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젊은 시절, 누구보다 양복 짓는 실력이 뛰어나 오히려 서울에서 명성이 높았다. 김종학 대표는 78세가 된 오늘날도 그때 그 명성 그대로 여전히 1mm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정확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세월이 비껴간 듯 안경도 없이 작은 바늘귀에 실을 척척 꿰고 있는 그에게 변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양복일에 첫발을 디딘 1950년대는 양복일을 10대 소년들이 배웠어요." 김 대표는 1958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외자청에 들어가 1년 정도 일을 했다. 이때 야간중학교를 졸업했다. 외자청 근무로는 비전이 없다고 판단한 김 대표는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15세 어린나이에 용인의 한 양복점 문을 노크했다. 그 양복점에서 재봉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남들은 8개월 걸려야 습득하는 잣눈 보기, 바느질 등을 5개월만에 마스터했어요." 그때부터 양복바지와 양복 윗도리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살림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이라 입던 양복을 뒤집어서 다시 옷을 해 입는, 일본말로 우라까이가 많던 시절이었다. 일을 잘하는 그는 우라까이를 많이 했다. 당연히 실력이 급속하게 늘었다.

 

김 대표는 그곳에서 후배를 가르치다가 제도를 배우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한국문화복장학원에서 6개월 속성과정을 3개월만에 뗐다. 학원에서는 17세밖에 안된 총명한 그에게 학원에 남아 강사를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신의 양복점을 운영하는 게 꿈이었던 김종학 대표는 곧바로 서울 명동의 양복점에 취직을 해서 서울 바느질 솜씨와 앞선 패션 감각을 익혔다. 그는 17세 나이에 직원을 거느리고 실력을 발휘했다. "당시 야간고등학교에 입학해 1년을 주경야독 공부를 했으나 사정상 졸업을 못한 상태에서 용인에 돌아왔어요."

 

17세에 귀향해 중앙시장 안쪽 청한상가에 있는 백마사에 취직해서 15~20분 만에 남방 하나씩 만들어 냈다. 손이 엄청 빨랐다. 백마사는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양복, 교복, 남방, 와이셔츠 등 모든 남성 맞춤복을 만들었다. "당시는 기성복이 없던 시절이라 모든 옷을 맞춰 입었어요. 일이 많을 때는 3일 밤을 자지 않고 옷을 만들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21세가 되자 군대 가기전에 직접 양복점을 운영해보기로 하고 백암면에 최초로 자신의 양복점인 문화양복점을 차렸다. "당시 백암은 전국에서 2번째로 큰 우시장이 열리던 용인의 부촌이었어요. 백암 5일장이 되면 명동 거리를 방불케 북적였죠." 시장분석을 한 김 대표는 백암시장이 서는 번화가에 양복점을 차렸다. 일이 많았다. 그곳에서 3년 동안 패션 등 많은 연구를 했다. 군 입대를 하게 돼 잘나가던 양복점을 팔았다.

 

1970년, 25세에 군대를 제대하니 일주일만에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에 제일 큰 컨트리 양복점 사장이 ‘선생, 빨리 올라오시오’라는 전보를 쳤다. 양복점에서는 윗 사람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컨트리양복점은 대형 양복점으로 할부 양복을 했다. 세일즈맨들이 바깥에 나가서 양복을 재왔다. 김 대표는 15명 직원을 거느리고 선생님으로서 제도만 했다. 자르는 일은 아래 기술자들이 했고 공장에서는 만드는 식으로 분업이 돼 있었다.

 

8개월정도 워밍업을 한 후 곧바로 용인으로 내려와 1970년 9월 3일 중앙시장 안에 문화라사를 오픈했다. 25세 때였다. 군대 가기 전에 백암에서 했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용인의 중심가인 김량장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양복점 직원 가족까지 25명을 먹여살릴 정도로 양복점이 잘 됐다. 서울에서 날렸던 김종학을 알아보는 손님들이 밀려들었다. 대로변에 빈자리가 없어서 시장 안에서 하다가 77년에 중앙시장 입구, 용인에서 가장 핫한 자리인 시장약국 자리로 확장 이전했다. 백암에서는 문화양복점이었지만, 김량장동에서는 문화라사였다. 이제는 원단 판매까지 취급했다. 하루에 33벌까지 체촌(치수를 재는 것)했을 정도였다. 윈도우에는 가봉한 옷 20~30개를 걸어둘 빈 자리가 없어서 겹쳐서 걸어놔야 할 정도였다.

 

김종학 대표의 양복 패션은 창의적이고 솜씨가 뛰어났다. 그는 당시 창의적, 창시적 기술에 대한 인증을 하는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로부터 ‘기술인정업소’ 패를 받았다. 지금도 문화라사 윈도우에 잘 전시돼 있다. 당시 양복 윗도리의 카라 줄무늬를 사선에서 가로줄로 제작함으로써 양복업계의 시선을 모았다. 서울에 갔더니 양복점 윈도우에 이미 유행이 됐다. 그는 백마사 시절에 점프복(스즈키복)을 창안해 유행을 시키기도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그가 편리성을 위해 만들어 입은 옷을 보고 엔지니어들이 맞춰 입으면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대한복장기술자협의회 용인지역 회장을 맡기도 했다.

 

25세 젊은 시절에는 용인시체육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유능한 CEO였음은 물론 정직, 신뢰, 인품, 지역사회 기여 등 지역사회 평판이 좋았다. 봉사활동에도 적극 나서 23개 단체 활동을 했다. 절대 단체활동과 비즈니스는 구별했다.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신조다. 용인민간기동순찰대 대장에 혼신의 열정을 쏟았다. 민간기동순찰대는 지역사회 정화 등 뛰어난 역할로 대통령 표창 등 다수의 수상을 했다. 대장으로 활동하면서 시간을 아끼기 위해 문화라사는 가장 먼저 문을 열고, 가장 늦게 문을 닫았다. 못 한 일은 집에 싸들고 가서 했다.

 

양복점이 너무 바빠 모든 활동을 접었다. 정직, 정확, 신뢰, 친절을 모토로 문화라사를 찾는 모든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에게 지위고하는 없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체형에 딱 맞는 수제 명풍 양복이 그의 손에서 탄생한다.

 

문화라사는 유명한 보물이 있다. 바로 아들들이다.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큰 아들 덕분에 문화라사하면 서울대, 서울대 하면 문화라사로 통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둘째 아들은 현재 3군사령부 중령이다. 그는 컴퓨터에 저장된 3000여명의 고객명단을 10년주기로 관리하면서 매일 아침 생일을 맞은 고객에게 기분 좋은 생일 축전을 보낸다. 70년대에 용인극장에 돈을 내고 문화라사를 홍보했을 정도로 마케팅 전략도 뛰어났다. 양복 일을 즐기면서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일에 신명을 바치는 그에게 정년은 없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가 정년이죠." 김종학 대표는 현역 패션계의 산증인이며, 명품 수제 맞춤 양복계의 진정한 장인이다.

                                                                                                                                      박숙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