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1 자기소개 다니카와 슌타로 저는 키 작은 대머리 노인입니다 벌써 반세기 이상 명사 동사 조사 형용사 물음표 등 말들에 시달리면서 살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저는 목수 연장 같은 게 싫지 않습니다 또 작은 나무를 포함해서 나무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것들의 명칭을 외우는 일은 서툽니다 저는 지나간 날짜에 별로 관심이 없으며 권위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팔뜨기이고 난시고 노인입니다 집에는 불단(佛壇)도 신위(神位)도 없지만 방 안에 직결되는 커다란 우편함이 있습니다 저에게 수면은 일종의 쾌락입니다 꿈을 꾸어도 눈만 뜨면 잊어버립니다 여기서 쓴 것은 다 사실인데 이런 식으로 말로 표현하면 왠지 수상하네요 따로 사는 자식 두 명 손자 손녀 네 명 개나 고양이는 없습니다 여름은 거의 티셔츠 차림으로 지냅니다 제가 쓰는 말은 값이 매겨질 때가 있습니다 .................................................................................................................................................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0 1년 오은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을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을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고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6월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7월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봅니다 그간 못 쓴 사족이 찬물에 융해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8월은 무던히도 덥습니다 온갖 몹쓸 감정들이 땀으로 액화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살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9월엔 마음을 다잡아보려 하지만, 다 잡아도 마음만은 못 잡겠더군요 10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9 신뢰 김승일 기계가 되고 싶다고 했지? 기계가 되는 법을 너는 몰랐지? 아직 몰라 답답하고 안타깝게도 우린 아직 기계 되는 법을 모르고 기계들은 네가 된다 본질적으론, 기계들이 네가 되면 기계가 너고 기계인 너는 오늘 되고 싶은 게 되어 있고 너는 이제 만족했을까? 입력하면 기계들은 믿는 것이다 믿기지가 않을 텐데 망설임 없이 기계에게 입력했다 너는 부자야 기계가 대답했다 나는 부자야 누가 내게 물어봤다 너는 부자야? 기계처럼 대답했다 나는 부자야 기계처럼 대답해도 나는 부자가 아니구나 만약 내가 진짜 부자면…믿을 수가 없을 거다 너무 좋아서 (…) ................................................................................................................................................. 우리는 더 이상 ‘신뢰’라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시의 첫 구절은 질문으로 시작되는데요. 나와 너는 기계가 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는 사이, 기계들이 먼저 네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8 비인간적인 김현 밤이 떠돌아 왔습니다. 인간은 헐벗은 몸 어둡고 웅크린 인간의 욕조 속으로 들어갑니다. 처음 물이 닿은 인간의 발가락 끝부터 쑥빛 비늘이 쑥쑥 돋습니다. 인간은 오랜만에 미끈거리는 감촉에 젖습니다. 인간은 두 다리보다 지느러미에 맞는 생물이야. 인간은 되뇝니다. 인간의 침대에 걸터앉아서 인간은 목을 늘립니다. 늘어진 목과 머리는 여럿이 나눠먹을 수 있는 인간의 밥상을 두리번거리며 불어터진 먼지를 쓸고 인간의 욕실까지 흘러갑니다. 흘러온 얼굴이 인간의 지느러미를 따라 움직입니다. 인간은 아가미로 숨 쉬고 숨죽입니다. 인간의 호흡을 잃었구나, 인간. 인간의 표정이 백랍처럼 빛납니다. 인간의 목덜미가 납빛으로 찢어집니다. 점점 희미해지는 어린 인간이 찢어지는 인간 곁으로 와 앉습니다. 어린 인간은 자라나는 혀를 불규칙적으로 잘라내며 모처럼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발명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인간의 말을 하지 않아도 돼! 늘어난 인간은 더듬거리고, 사라지는 인간의 혀들은 꿈틀거리고, 변신한 인간은 한결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갖고, 멈춰있습니다. 욕조의 수면이 밤의 수면까지 밀려갑니다. (…) ...........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7 작은 상자 바스코 포파 작은 상자에 처음으로 젖니가 나고 짧은 길이와 좁은 넓이와 작은 공허 그리고 그 밖의 여백을 그녀는 가지고 있다 작은 상자는 계속 자란다 그녀의 안에 들어 있던 찬장은 지금 작은 상자 안에 있다 그녀는 커지고 커지고 더 커지며 자라난다 이제 방은 그녀의 안에 들어와 있고 집과 도시와 대지도 이전의 그녀가 알던 세계도 안에 들어와 있었다 작은 상자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간절히 돌아가고 싶어 다시 그녀는 작은 상자가 되었다 이제 작은 상자 속에는 축소된 전 세계가 있다. 당신은 그것을 쉽게 주머니에 넣을 수 있고 쉽게 훔칠 수도 쉽게 잃어버릴 수도 있다 작은 상자를 조심하라 -------------------------------------------------------------------- 낯선, 새로운 시편이지요. 포파의 이 시는 테드 휴즈의 시 입문서 ‘시란 무엇인가’의 앞머리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 휴즈의 이 책은 저자가 진행했던 시 수업의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요. 그가 이 작품을 우선적으로 소개한 이유는, 시에 대한 정의와 연관이 깊습니다. 그러나 시는 정의 내려지는 순간,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6 반성 100 김영승 연탄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머.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껌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기를 해주리라.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면서 얘기했다. ................................................................................................................................................. 연탄, 그저 연료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기 어렵지요. 그렇게 무른 살결로 그렇게 따뜻할 수 있다니. 오늘의 주인공은 셋, 연탄장수인 아빠와 두 딸이 나옵니다. 우리는 시의 초입에서, 그들이 가야할 집이 골목 끝이 아니기를 바라게 되지요. 숨을 몰아쉬었겠지만 무사히 도착했다니 다행 입니다. 하나 둘 셋…. 딸이 아빠에게 전하는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머”라는 말은 추측일까요, 다짐일까요. 분홍 소녀들이 검은 연탄을 나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5 뜰힘 이현호 새를 날게 하는 건 날개의 몸일까 새라는 이름일까 구름을 띄우는 게 구름이라는 이름의 부력이라면 나는 입술이 닳도록 네 이름을 하늘에 풀어놓겠지 여기서 가장 먼 별의 이름을 잠든 너의 귓속에 속삭이겠지 나는 너의 비행기 네 꿈속의 양떼구름 입술이 닳기 전에 입맞춤해줄래? 너의 입술일까 너라는 이름일까 잠자리채를 메고 밤하늘을 열기구처럼 솟아오르는 나에 대해 ................................................................................................................................................. 가을 하늘, 몇 겹의 파란 종이. 시인은 우리에게 새, 구름, 입술, 별, 비행기에 대해 속삭입니다. 그 속삭임에는 존재의 동력에 관한 비밀이 숨어있는 것 같지요. 일찍이 셰익스피어는 ‘장미는 장미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향기롭다’고 했습니다. 과연 새와 구름 그리고 별이 하늘에 머무를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질문을 잠시 접어두고, ‘나’는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립니다. 잠든 ‘너’에게 아득한 별의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4 가구의 힘 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 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3 속수무책 김경후 내 인생 단 한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척 하고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 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시계엔 바늘 대신 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 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절벽에 가지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 독서 중입니다, 속수무책 ................................................................................................................................................. 우리에게는 인생을 함께 하는 수많은 책이 있지요. 시인은 오늘 단 한 권의 책을 소개하기로 마음먹은 듯 합니다. 과연 책 읽는 시간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과 관련이 깊겠지요. 그런가하면 책과 혁명의 연관성에 관해 주목할 만한 목소리를 낸 바 있는, 일본의 한 사상가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기고 있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2 칠 조심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칠 조심”― 내 마음이 조심하지 않는 바람에 내 기억은 종아리와 뺨과 팔과, 입술과, 눈에 온통 얼룩져 버렸다. 내가 너를 그 모든 성공과 실패보다 더 사랑한 것은 너와 함께 있으면 누르스름한 흰 빛이 하얗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 어둠 또한 친구야, 맹세하건대, 어떻게든 하얗게 될 거야, 헛소리보다 전등갓보다도 이마에 감은 흰 붕대보다도 더 하얗게! ................................................................................................................................................ 가을이 왔지만 수선스러운 마음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그토록 조심하지 못했던, 혹은 않았던 걸까요. 오늘의 시는 “칠 조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사뭇 결연하기만 합니다. 종종 아니 수시로 우리가 마음을 돌보지 못하는 사이, 기억은 온 몸에 흔적과 얼룩을 만들어 내곤 합니다. 사회적 기억 또한 같은 이치로 작동하는 것이겠지요. 시적 주체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1 나는 저 아이들이 좋다 이성복 나는 영혼에 육신을 입히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너무 사랑했다. -세르게이 예세닌, 「우리는 지금」 나는 저 아이들이 좋다. 조금만 실수해도 얼굴에 나타나는 아이, “아 미치겠네” 중얼거리는 아이, 별 것 아닌 일에 ‘애들이 나 보면 가만 안 두겠지?’ 걱정하는 아이, 좀처럼 웃지 않는 아이, 좀처럼 안 웃어도 피곤한 기색이면 내 옆에 와 앉아도 주는 아이, 좀처럼 기 안 죽고 주눅 안 드는 아이, 제 마음에 안 들면 아무나 박아 버려도 제 할 일 칼같이 하는 아이, 조금은 썰렁하고 조금은 삐딱하고 조금은 힘든, 힘든 그런 아이들. 아, 저 아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내 품에 안겨들면 나는 휘청이며 너울거리는 거대한 나무가 된다. ................................................................................................................................................. 좋다, 라는 말 참 좋지요. 그 어떤 말보다 투명한 말인 것 같습니다. 실수가 아닌 잘못, 잘못이 아닌 죄를 짓고도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0 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을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 멀리서 가까이서 잘 익은 사과향. 당신에게 여치와 자전거 바퀴, 그리고 보랏빛 바람 소리를 들려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