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0 찬란한 봄날 김유섭 나무들이 물고기처럼 숨을 쉬었다 비가 그치지 않았다 색색의 아이들이 교문을 나섰다 병아리 몸짓의 인사말조차 들리지 않았다 물살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문구점 간판이 물풀처럼 흔들렸다 자동차가 길게 줄을 서서 수만 년 전 비단잉어의 이동로를 따라 느릿느릿 흘러갔다 물거품으로 떠다니는 꽃향기 속 수심을 유지하는 부레 하나 박제된 듯 정지해 있었다 위이잉, 닫혔던 귀가 열렸다 아이를 기다리던 엄마가 환해지며 비늘 없는 작은 손을 잡았다 꽃무늬 빗물이 찬란한 누구나 헤엄쳐 다니는 봄날이었다 --------------------------------------------------------------------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봄날’은 과거에 있을까요. 미래에 있을까요. 어쩌면 모든 ‘찬란한 봄날’은 현재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시인이 포착해 놓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유년 시절과 함께 떠오르는 단어들, 교문과 병아리와 문구점 등등. 우리는 어느새 느릿느릿 그 시간과 마주하게 있습니다. 어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면서부터, 닫혀버린 귀가 일순 ‘위이잉’ 열리는 것도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네요.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89 리라 손택수 리라 있지? 고대엔 리라 현을 양의 내장으로 만들었대 내장을 재로 씻어서는 갈기갈기 찢었지 하필 재였을까 잿더미였을까 멀리 독일까지 가서 고고학 공부를 하는 허수경 시인에게 들었다 왜 고국을 떠났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담담하게 시 때문이라고 했다 독하구나, 모국어를 위해 모국을 떠나다니 시인의 말을 받아적은 종이도 독을 삼킨 것이다 종이라면 제지공이었던 유홍준 시인이 생각난다 산판에서 벌목공 일을 할 때 양잿물 마시고 죽으려 길 몇 번, 양잿물 팔자가 어디 가겠노 살다보니 펄프에 양잿물을 타고 있더라 양잿물 마신 종이에 시를 쓸지 누가 알았겠노 말년엔 시 한 편이면 천하 원수도 다 용서가 될 것 같다고 안주도 없이 소주를 마시던 박영근 시인도 생각난다 수전증에 걸린 손으로 술잔을 건네던 그가 나는 꺼림칙했다 손의 발작이 옮겨오면 어쩌나 멀찌감치 떨어져 지냈다 겨울밤 덜덜덜 발작이라도 하듯 모포를 덮고 떠는 창문 옆에서 모니터를 면경처럼 들여다보고 있다 야근을 자주 하면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데, 위장병과 소화장애 환자가 되기 십상이라는데 무슨 독한 사연도 없이 쓰린 속을 움켜쥐고 누가 시키지도 않는 야근을 하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88 나의 매화초옥도 조용미 눈 덮인 산, 무거운 회색빛 하늘, 초옥에서 창을 열어두고 피리를 불며 앉아 있는 선비의 시선은 먼데 창밖을 향하고 있다 어둑한 개울에 놓인 다리를 밟고 건너오는 사내는 어깨에 거문고를 메고 있다 멀리서 산속에 있는 벗을 찾아오고 있다 방 안의 선비는 녹의를 그는 홍의를 입고 있다 초옥을 에워싸고 매화는 눈송이가 내려앉듯 환하고 아늑하다 매화를 찾아, 마음으로 친히 지내는 벗을 찾아 봄이 오기 전의 산중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생겨나고, 부유하고, 바람의 기운 따라 천지간을 운행하는 별처럼 저 점점이 떠 있는 흰 매화에서 우주의 어느 한 순간이 멈추어버린 것을, 거문고를 메고 가는 한 사내를 통해 내가 보았다면 눈 덮인 산은 광막하고 골짜기는 유현하여 그 속에 든 사람의 일은 참으로 아득하구나 천리 밖 은은하게 번지는 서늘한 향을 듣는 이는 오직 그대뿐 밤하늘의 성성한 별들이 지듯 매화가 한 잎 한 잎 흩어지는 봄밤, 천지간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나는 그림 속 사람이 된다 별빛이 멀리서 오듯 암향도 가깝지 않다 -------------------------------------------------------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87 그대에게 가는 모든 길 백무산 그대에게 가는 길은 봄날 꽃길이 아니어도 좋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새하얀 눈길이 아니어도 좋다 여름날 타는 자갈길이어도 좋다 비바람 폭풍 벼랑길이어도 좋다 그대는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그대는 그곳에서 그렇게 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일렁이는 바다의 얼굴이다 잔잔한 수면 위 비단길이어도 좋다 고요한 적요의 새벽길이어도 좋다 왁자한 저잣거리 진흙길이어도 좋다 나를 통과하는 길이어도 좋다 나를 지우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나를 베어버리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꽃을 들고 가겠다 창검을 들고 가겠다 피흘리는 무릎 기어서라도 가겠다 모든 길을 열어 두겠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하나일 수 없다 길 밖 허공의 길도 마저 열어두겠다 그대는 출렁이는 저 바다의 얼굴이다 -------------------------------------------------------------------- 그대에게, 미래에게 가 닿을 수만 있다면, 그 길이 꽃길이든 눈길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요. 자갈길 혹은 벼랑길이라도 달게 걷고 걷게 될 것 같습니다. 걷는 것만이 방법이라면 말이지요. 한 걸음 한 걸음이 새로운 발돋움일 테니까요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86 세 스님 이승훈 먹물 옷 입고 겨울 모자 쓰고 등에는 배낭 메고 젊은 스님 셋이 돌다리 밟고 어디 간 다. 겨울 안거 마치고 어디로 가는 세 스님. 첫 번째 스님은 흐르는 물 보고 손은 비구 옷에 숨기고, 뒤에 오는 스님은 고개 숙이고 검은 장갑 끼고 모자는 스님 모자, 세 번째 스님은 꼿꼿이 서서 돌다리 건넌다. 물은 흐 르고, 집은 보이지 않고, 우물도 보이지 않는 다. 흐르는 물은 무슨 말을 하고, 세 스님은 어디로 가는가. 아침 햇살이 내린다. -------------------------------------------------------------------- 한 겨울 개울물처럼 맑고 시린 풍경이 여기 있습니다. 이승훈 시인은 ‘그냥 쓴다’라고 말한 바 있지요. 아마도 그건 이유 없음의 이유일 것. 그 ‘무심’만이 동력이며 목적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시인에게 시는 깨달음의 과정 그 자체. 과연 세 스님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도반. 물은 흐르는 것으로 무슨 말인가를 건네고, 젊은 스님들은 묵묵히 걷는 것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바르트가 보았다면, 무언어의 상태가 곧 깨달음이라는 확신을
시로 쓰는 편지 85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니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 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
시로 쓰는 편지 84 석류 신동옥 가지 끝에 피톨을 머금고 삼켜 솟구치는 불의 나팔 밤하늘로부터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대답에 귓바퀴를 안으로 돋는 옹골찬 타악기 떨어져 썩은 한 알이 가지에 기어올라 과육을 졸이고 졸여서 쪼그라 들어서 샅을 긁고 습진을 털어내고 다시 잎을 틔울 때 끝간 데까지 저를 물리고도 모자라 검붉게 달아오른 핵, 탄착점 없는 열정이 꿈꾸는 희생자 없는 세계의 고요한 애절양(哀絶陽).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해, 모두에게 주어진 새로운 시간입니다. 약속처럼 모든 해는 붉게 떠오르지요. 해돋이를 보다 떠오른 건 뜻밖에도 붉은 석류. 그 모습이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겠지요. “가지 끝에 피톨을 머금고 삼켜 솟구치는 불의 나팔”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을 향해 목청껏 외치는 일에 조금 지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해야할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희망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러한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석류 알처럼 단단한 마음이 아닐까요. 다시 한 번 ‘마음의 사회학’을 떠올려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83 이면의 무늬 홍일표 개가 개의 꿈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파도의 자세를 이해하는 것은 힘들고 위험한 일 공원의 가로등은 아무것도 결심하지 않았는데 불이 켜지네 겨울이 명백한 휴머니스트라고 말하지 않아도 눈은 내리고 가로등은 끊임없이 어둠의 중얼거림을 거절할 뿐이네 발꿈치에 다른 계절이 눈물처럼 스미는 것 천 년 전 바람이 남긴 말의 각질을 뜯어내며 질기고 딱딱한 공기의 살과 해후하네 나는 드라이아이스 같은 너의 노래를 들으며 여기는 최소한 거기가 아닌 곳이라고 중얼거리지만 여전히 촛불은 미완의 음악 따듯하게 응고된 슬픔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견디는 것 그 사이 수차례 다녀간 눈과 비 봄과 겨울도 모르는 또 다른 목청의 노래가 발바닥이나 겨드랑이에 서식하는 걸 아직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파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네 5분간, 내가 읽지 않은 파도의 표정이 거듭 쓸쓸해지네 ----------------------------------------------------------------------------- 송년, 홍일표 시인의 시집 『매혹의 지도』를 펼쳐 봅니다. 시인의 말에서 그는 “명왕성에 라일락이 피는, 혹은 457년 만의 두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82 나의 아름다운 방 신영배 오후 두 시 방향으로 나는 상자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얇게 접어둔 다리 의자는 새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앉아 있던 잠이 툭 떨어져 내린다 의자가 쓰러지고 새가 아름답게 나는 방 오후 네 시 방향으로 나는 물병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흠뻑 젖은 주둥이로 다리를 조금 흘린다 관 뚜껑을 적시는 문장 화분은 고양이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깨진 고양이가 내 손등을 할퀸다 씨앗이 퍼진다 갈라진 손등에 고양이를 묻고 해 질 녘 손의 음송 오후 여섯 시 방향으로 나는 기다란 악기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붉은 손가락으로 관 속의 다리를 연주한다 커튼은 물고기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젖히자 출렁이는 강물 속 내 다리가 아름답게 흐르는 방 -------------------------------------------------------------------- 시인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방’에 관한 이야기. 이 작품에서의 방은 마지막 연에서 볼 수 있듯이 “출렁이는 강물 속/내 다리가 아름답게 흐르는” 공간입니다. 이를 소급적으로 적용해서 시적 주체인 ‘나’의 정체성에 관해 알아볼까요. ‘나’는 세상의 모든 그림자를 가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81 뜨거운 곡선 박성준 기념하고 싶은 날을 만듭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꿈이 꿈을 꿉니다 나는 내 숨소리에서 네가 가장 두렵습니다 남자가 안개처럼 눈을 감으면 만나지 못한 방들은 햇빛이 됩니다 이때 여자는 눈을 감고 겨우, 냄새에 대해 생각하곤 합니다 새들이 제 그림자를 쫓아가 울면 맥박은 조금 더 분명해졌을까요 어떻게 한 번쯤 죄인이 되지 않고서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는지 먼 곳에서 물소리가 들립니다 무슨 말이든 해달라는 얼굴로 늘상 고함을 쳐도 좀체 구름 떼는 짐승 바깥으로 돋지 않고 용서나 허락이 필요한 아침입니다 창문들이 어디론가 메스껍습니다 손톱처럼 웃던 여자는 하품을 하다가 눈물을 흘립니다 종이에는 의자가 숨어 있고 물속에는 죄다 수술 자국뿐입니다 벌써부터 도착해 있는 자목련은 남자의 이마를 닮았습니다 신작로 위에 분분하던 잿빛들은 놀랍게도 무릎이 아닙니다 대체 이게 다라면, 남자는 계단을 내려가고 여자는 계단을 붙잡아 지웁니다 우리는 평평하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 나는 나에게 거절당한 적이 있습니다 하품을 하면 눈물이 나는 이유는 꿈에서나 슬퍼할 일을 먼저 예감했기 때문입니다 -----------------------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80 이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요 세사르 바예호 “이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요”라고 너는 내게 말한다. “다 가버렸어요. 응접실, 침실, 정원에는 인적이 없습니다. 모두가 떠나버려서 아무도 없지요.” 나는 네게 이렇게 말한다. 누가 떠나버리면, 누군가가 남게 마련이라고. 한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이제 아무도 없는 곳이 아니라고. 그저 없는 것처럼 있을 뿐이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곳에는 인간의 고독이 있는 것이라고. 새로 지은 집들은 옛날에 지은 집보다 더 죽어 있는 법. 담은 돌이나 강철로 된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집을 짓는다고 그 집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집에 사람이 살 때에야 비로소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집이란, 무덤처럼,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이지. 이것이 바로 집과 무덤이 너무너무 똑같은 점이지. 단, 집은 인간의 삶으로 영양을 취하는 데 반해서, 무덤은 인간의 죽음으로 영양을 취한다는 게 다른 거다. 그래서, 집이 서 있고, 무덤은 누워 있는 법. 모두들 집에서 떠났다는 것은 실은 모두들 그 집에 있다는 것. 그렇다고 그들의 추억이 그 집에 남은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79 물속의 방 송재학 저수지마다 물의 방이 있지는 않지만, 내 왼쪽 저수지는 고요했기에 매년 사람이 빠졌다 물의 낭떠러지에 물의 방이 있어야만 했다 얼음장이 움푹 꺼질 때의 탄식만을 본다면 물의 방은 수심이 그은 금의 내부이다 언젠가 얼어버릴 물의 시퍼런 능선이 가시를 내밀었던 자국까지이다 물의 뼈는 수은 같은 금속이라 단단하고 자유롭다 그러니까 물고기는 물과 수은을 닮아 푸른 등뼈를 만들었다 물의 방에도 비늘과 아가미가 있어 물고기와 비슷하다 물풀처럼 일렁이는 이야기는 부레 없이 지느러미 각주를 달고 물의 시렁에 뼈만 추스려 얹었다 가끔 죽은 뼈가 닿으면 물의 속눈썹부터 손사래를 쳤다 내 안에 부릅뜬 사람이 있듯 물의 어두운 곳에 물의 영혼이 있다 물의 침전물이 고스란히 간직되듯 내 안의 사람은 다시 나를 느낀다 수면의 악다구니와 달리 물의 방은 어제 가위 눌린 눈물이 필사되는 곳이다 물이 일일이 울고 있다 --------------------------------------------------- 송재학 시인이 들려주는 ‘물속의 방’. 모든 “저수지마다 물의 방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의 방은 반드시 있어야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