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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집

김명섭 단국대 연구교수






[용인신문] 순국선열일 추계리 영화지에서 굴욕의 역사를 반추하다


추계리 송병준 별장에서 국치를 기억하다

 

1117일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다 희생된 순국선열들을 기린지 80회가 되는 날, 용인의 항일의병들과 선량한 농민들의 피눈물이 배어 있는 용인 처인구 양지면 추계2리 송병준의 옛 별장터를 찾았다. 이완용과 함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친일파 거두인 송병준(宋秉畯, 1858~1925)99칸짜리 별장은 어느새 온누리세계선교센터의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로 탈바꿈되었다. 나라를 팔아 온갖 권세를 누렸던 그의 솟을대문과 1891년 건축 당시 길가에 심겨진 고목과 석물들도 사라진 지 오래이다.


함경남도 장진이 고향인 송병준에게 양지면 추계리는 어떤 역사적인 장소일까. 도둑질과 비렁뱅이로 떠돌던 그를 서울로 불러들인 이는 민씨척족의 세도가인 민태호 즉, 민영환의 양아버지였다. 천하지만 영악했던 그에게 애첩을 돌보게 하면서 민영환의 식객이 된 송병준은 무과에 급제해 수문장과 사헌부감찰 등에 나가게 된다. 1882년 임오군란 무렵 군인들이 개화세력을 공격하였을 때 송병준도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니 일찍이 매국행각이 알려진 모양이다.


송병준은 일본 부인과 자녀를 집에 숨겨준 덕에 공사관의 신임을 얻어 일본에 건너갔다. 이후 민비의 총애를 입어 18905월부터 18944월까지 양지현감을 지냈다. 하지만 갑오개혁으로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지자, 재빨리 일본으로 도망가 노다 헤이치로란 일본인 행세를 했다. 그는 10여 년간 일본 고위층과 교제를 넓혀가 양잠과 염직기술을 익혔다. 러일전쟁이 일어나 초대 조선총독이 되는 데라우치 마사다케 공사의 고등통역관으로 금의환향한 그는 군납상인(PX)으로 많은 이권을 챙겼다. 또 이용구를 동원해 일진회를 만들게 하여 반일 인사의 돈을 뜯는 갖은 악행으로 거액을 축재했다. 더욱이 그는 후원자였던 민영환이 190511월 순국 자결하자, 부인에게 땅을 보존해 준다며 허위증서로 속여 500석지기 땅을 갈취하는 배은망덕을 저질렀다.


본채 99칸 별장 지어 거대한 군사요새화

일진회원 400여명·일본군 50여명 상주

총독부 관료·친일인사 회합·만찬장 활용

지금은 영화지 연못자리만 희미하게 남아


송병준은 추계리의 빼어난 경관을 잊지 못해 이곳에 광주군 도척면의 큰 한옥을 헐어 자신의 별장 짓는데 활용했다. 본채만 99칸이며 산 능선을 따라 커다랗고 높은 담장을 쌓은 10만여 평의 별장에는 일진회원 400여 명과 일본군 50여명이 상주할 정도였으니, 거대한 군사요새인 셈이다. 이 대저택이 총독부 관료들과 친일인사들의 회합장소와 만찬장으로 활용했음은 물론이다.


나아가 송병준은 수원과 용인읍내-이천-여주를 잇는 신작로(42번 국도)를 강제로 계발해 내륙의 좋은 쌀과 도자기를 일본으로 유출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니 용인을 비롯한 경기 지역민들의 민원이 빗발쳤고, 의병들이 직접 추계리 별장을 급습하는 일도 잦아졌다. 19078월 보도된 신문에 의하면, 의병두령 남태희가 송병준의 별장을 습격해 일본군 총과 말을 노획했다고 하며, 의병활동을 피해 일진회원 400여 명이 그의 집에 피신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진회원들도 이곳을 본부로 삼아 항일의병을 비롯해 마을 지사들을 잡아다 고문하였다. 평창리 출신의 의병장 임옥여도 190711월 잠시 고향집에 들렀다가 일진회 회원들에게 체포되어 현장에서 사살되었고, 명포수로 죽산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펼치던 오의선(오광선의 부친)도 일진회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었다. 이런 공로로 송병준은 내부대신과 궁내부 대신에 등용되었다.


1907년 고종황제가 비밀리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할 때도 송병준은 고종을 일본에 보내 천황에게 사죄하게 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권총과 칼을 차고 궁궐에 들어가 고종을 협박하며 행패를 부렸다. 안하무인의 행패로 인해 그는 미국 영사의 항의를 받아 2년 만에 대신에서 쫒겨나야 했다. 그럼에도 19109월 한일병합의 공을 인정받아 자작(뒤에 백작)과 은사금 10만엔, 금시계 등을 받았다.


송병준은 1919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 동화정책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일제로부터 5만엔의 공작금을 받아냈다. 1920년대에 이르러 전국에 소작쟁의가 크게 일어나자, 그는 조선소작인상조회를 만들어 한편으로 많은 땅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고, 소작쟁의를 파괴하는 활동을 벌였다. 조선총독부도 송병준을 위해 이곳을 지나가는 수원-여주간 전철의 간이역까지 만들어 전용하도록 배려했으니 위세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말년의 송병준은 추계리 별장에 영화지(映華池, 꽃이 물에 비친다는 뜻)라는 전통연못을 지어놓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곳에 이완용을 비롯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군 사령관 등이 인사를 왔다고 한다. 부러울 것이 없던 그도 192521일 숨을 거두어 추계리 뒷산에 묻혔다. 욱일동화대수장이 추서되었고, 일본 천황이 포도주 12병을 내려 조의를 표했다. 그의 많은 재산과 백작 작위는 장남인 송종헌에게 물려졌다.


해방 후 송종헌은 추계리 별장과 전답을 처분해 서울로 피신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1개월 만에 풀려났다. 송종헌의 손자 등은 전국 여러 곳의 토지와 관련해 수차례 소송을 낸 바 있다.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송병준 부자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2008년경 양지초등학교 운동장 앞 도로공사 도중, 교문 옆에 묻혀있던 두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송병준이 장위영 영관이 되었던 시기(1891)에 제작된 선정비와 아들 송종헌이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물려받으며 만든 기념비였다. 송종헌이 일제 침략전쟁을 찬양하며 팔굉일우라 쓴 비석도 발견되었다. 현재 두 부자의 묘는 비난을 두려워한 후손에 의해 파묘되어 화장함에 따라 흔적조차 없어졌다.


다만 저택 동쪽 숲 안쪽에 영화지 연못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채 표석과 함께 방치되어 있다. 걸어서 10분정도 걸릴 정도로 컸던 한갓 볼품없는 웅덩이처럼 퇴락해 버렸지만, 우리나라 전통정원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고 돌기반 보존상태도 양호해 복원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시급히 지방 문화재로 지정하여 부끄러운 굴종의 역사에 반면교사로 삼을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살려지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