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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만해기념관 전보삼 관장

용인신문이 만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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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신문 3월 7일 보도    -취재/김종경 발행인 iyongin@nate.com

                          -영상취재,제작/백승현 PD  ytvnews@hanmail.net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만해기념관 관장 전보삼 (한국박물관협회장 / 신구대학 교수)

현대의 스마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 한용운”
만해 연구가로 반세기 살아…제2의 독립군 자처

삼일절이 지나갔다. 92주년을 맞은 3·1운동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다양한 행사가 진행됐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가수 김장훈은 독도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3·1운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또 독립운동의 정신은.
기자는 지난 2월24일, 시인이자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의 발자취를 찾아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자락에 있는 만해 기념관을 방문했다. 거기엔 이미 100여 년 전 인간중심의 사상을 실천했던 만해 한용운(1897~1944)을 연구하며 반세기를 살아온 전보삼 관장이 있었다.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고 위당 정인보는 말했다.
그만큼 만해는 민족의 자존이요, 영광이다. 이 같이 위대한 조선의 지도자였던 만해의 인생과 사상을 반세기 동안 연구하고 전파하며 ‘제2의 독립군’을 자처하며 살아온 관장을 만나 만해와의 인연 맺음과 사랑이야기를 긴시간 나눴다.

-만해 한용운을 언제 알게 됐는지요.
“저는 강릉 태생입니다. 인근에 강릉포교원이 있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어려서부터 반야심경을 줄줄 외웠지요.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에 대해 물었고, 그러던 중 한 스님이 나에게 던져준 것이 바로 『님의 침묵』(만해 한용운 시집)이었어요. 그 속에 나의 궁금증이 다 있었습니다.”
호기심 많던 소년이 『님의 침묵』시집을 처음 읽고 충격을 받았다. 그 때가 중학생 때였으니 신동소리 듣는 건 당연지사였다. <님의 침묵>에 나오는 ‘님(Nim)’은 어린이부터 대석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역작이라고 주장한다. 님과 침묵의 상호관계를 생각 할수록 그 깊은 뜻을 알 수 있다는 것. 그 소년은 그때 팔만대장경까지 독파했다. 처음엔 뜻도 모르고 읽었지만, 그 속에서 수많은 진리를 만나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총학생회장을 지냈는데, 그때도 친구들에게 <님의 침묵>을 낭송해주고, 돈을 걷어서 만해 제사를 지냈어요. 당시엔 청소년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을 정도였어요.”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국어교과서에 만해의 <알수 없어요>라는 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 친구들이 선생님께 ”보삼이가 잘 알아요”라고 말했고, 그 덕분에 교단으로 불려나간 소년은 선생님 대신 1시간 동안 강의를 했다. 이것이 자신감을 얻게 된 계기가 됐고,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됐다.

-서울엔 언제 가게 됐고, 거기서 뭘 하셨는지요.
“1968년도에 서울로 대학을 갔고, 그때 스스로에게 세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첫째는 만해 묘소가 있는 망우리 공동묘지를 찾아갈 것. 둘째는 만해가 말년을 살았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을 찾아갈 것. 셋째는 만해의 제자 강석주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전 관장은 2년 만에 만해 묘소를 찾았고, 당시 신문에도 대대적인 보도가 됐다. 성북동 심우장은 만해가 1933년 조선총독부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집이다. 당시 동국대 교수가 세를 살고 있었지만, 전보삼은 기다렸다가 80년도에 자신이 세를 들어갔다. 이후 3년 여간 행정관리들을 설득해 만해 기념관을 만든 후 1985년도에 서울특별시기념물 제7호로 지정하게 이르렀다. 그리고 마지막 약속까지 모두 지켰다.

-그런데 남한산성엔 언제, 왜 오게 되셨나요.
“당시 성북동 기념관은 외진 곳의 비탈길이라 사람들이 오질 않았어요. 그리고 광화문 사거리엔 사람은 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식후경을 면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어딘가 찾다보니 남한산성이더군요. 처음엔 집을 얻어 만해기념관을 만들어 놓았는데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그래서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모두 정리한 후 옮겨와 지금의 만해기념관을 짓게 됐습니다. “
남한산성으로 온 이유는 또 있었다.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1700개 성 중에서 8도 승군을 동원해 쌓은 곳으로 삼학사(三學士)의 정신이 있는 곳이다. 이는 만해의 정신과도 같기 때문에. 처음엔 왜 하필 굴욕의 땅 남한산성이냐며 반대의 목소리도 많았다. 하지만 왕조실록을 살펴보니 남한산성만큼 민족자존의 성지인 곳도 없었다. 패배의 땅이요, 굴욕의 땅이라는 인식은 식민사관일 뿐이다.

- 그동안 남한산성이 많이 변했는데요.
“가장 먼저 남한산성에 있었던 행궁 복원 운동을 했습니다. 또 에코미즘 차원에서 한옥지원조례를 만들었고, 이 지역은 모두 한옥만 건축할 수 있도록 했고, 그 결과 한옥마을이 생겼습니다.”
인터뷰를 했던 만해 기념관 2층에서는 새롭게 조성된 행궁이 가깝게 보였다. 옛날 임금들의 휴양지(지금의 청남대)였던 곳이다. 당시 조선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의 기록 때문에 복원이 수월했다고 한다.

- 얼마 전 (사)한국박물관협회 회장으로 취임하셨는데.
“남한산성과 만해의 힘으로 박물관협회 회장을 맡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운영하는 사람을 ‘제2의 독립군’이라고 생각합니다. 힘은 들지만 이런 것 때문에 정신도 맑아지고, 힘이 생긴답니다.”
전 관장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등록 박물관은 700여개, 미등록은 300여개다. OECD국가 중 꼴찌 수준이다. 선진국 기준으로는 인구 7만5000명당 1개가 있어야 한다. 2004년부터는 정부에서 공모사업을 통해 선별적 지원을 하고, 이젠 일부 인건비까지 지원받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아직도 정비해야 할 제도가 많고, 공무원들의 의식 변화가 필요하다. 박물관협회 회장으로서의 과제이자 다짐이기도 하다.


인터뷰는 반복해서 전 관장 특유의 달변으로 만해 한용운의 시세계와 사상,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파노라마처럼 그려지기 시작했다.
만해는 육신의 고향은 홍성이지만, 정신의 고향은 백담과 내설악, 그리고 삶의 현장은 성북동이라고 규정한 전 관장은 만해 문화지도를 만들었고, 이젠 스토리텔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만해는 시인이나 사상가, 또는 독립운동가 중 어느 것 하나로 고정화 시킬 수 없는 중정(中正)의 도를 가르쳤다는 것이 전 관장의 주장이다.

전 관장은 1974년 대학시절 만해전집(신구문화사) 6권을 만들어 2000질을 맨투맨으로 몽땅 팔았을 정도로 만해에 미친 사람이다. 만해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으

   
로는 국문학자도 아닌 그가 국내 최초로 『님의 침묵』정본텍스트를 발간했다. 그동안 나왔던 수많은 유통본들이 많게는 수백 개의 오탈자가 있을 정도로 엉터리였다. 그의 노력덕분에 조만간 만해의 시는 소월 시와 함께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계획이다. 전 관장이 사상가였던 만해의 시를 남달리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전 관장은 마지막까지 국가의 나아갈 방향과 후학들에 대한 교육 방향제시도 잊지 않았다.


“이젠 창의와 인성의 시대입니다. 그것이 바로 스마트 시대죠. 스마트 시대는 창의적인 사람이 지배하는 시대, 바로 소셜 네트워크가 중요합니다. 국가의 개념도 바뀌고 있고, 결국 만해 정신을 정점으로 모이게 될 것입니다. 만해가 꿈꾸었던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회, 만해는 이미 스마트 시대를 예견하며 살았던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