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천 남구만은 역사를 관통한 시대의 거물”

  • 등록 2009.11.02 14: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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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 | 약천 남구만 심포지엄

   

용인지역에서 최초로 조선후기의 문신인 ‘약천 남구만(南九萬:1629∼1711)’ 심포지엄이 열렸다. 용인문학회(회장 김종경)는 지난 10월 24일 용인문화예술원 공연장에서 ‘약천 남구만 심포지엄’과 ‘제6회 용인시 문학의 밤’을 포함한 ‘제1회 약천문학제’를 개최했다.

김종경 회장 사회로 진행된 심포지엄은 의령남씨 문충공파 종중 남정휴 회장이 환영사를 했고, 이종민 용인문화원장이 축사를 했다. 기조 발제를 한 강남대 홍순석 교수와 3명의 주제발표자들은 약천 남구만의 생애와 문학세계, 그리고 향토사에서의 의미와 기념사업 제안 등 다양한 논의가 이뤄졌다. 지면관계상 주요내용들을 요약발췌, 약천 남구만을 새롭게 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 기조발제: 홍순석(강남대학교 교수, 한문학 전공) “ 약천 선생, 용인 향토사적 위상 높아”

약천 남구만을 거론하면, 사람들은 흔히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를 떠올린다. 그만큼 약천은 다른 문학 작품보다 시조 작가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별반 없었다. 성당제의 『약천남구만문학연구』에서 약천의 <번방곡>을 거론하면서 다룬 것이 고작이다. <번방곡>은 조선 초부터 민간에서 불리어지던 11곡의 시조를 한시(漢詩)로 번역한 작품이다. 여기에 <동창이 밝았느냐>의 한역시가 <동창곡(東窓曲)>이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최해종(崔海鍾)은 『한국한문학사』에서 ‘그(남구만)의 시는 전원 취향이 있는데, 시조 또한 이와 같다. (其詩 有田園趣而 詩調亦如之)’고 하면서 <동창곡> 1수만을 제시하였다. 이가원(李家源)은 『한국한문학사』에서 악부(樂府)를 논하면서 작품 분석 없이 11수 가운데 3수만을 제시한 뒤, <동창곡>의 원사(原詞)를 남구만의 작품으로 인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이가원은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를 이명한(李明漢: 1595∼164 5)의 작품으로 제기하였다. 그러나 현재 『청구영언(靑丘永言)』에 남구만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고, 또한 이명한의 문집인 『백주집(白洲集)』에 이 작품이 실려 있지 않아,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 같은 정황 속에서 이승철은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를 남구만이 동해시 약천마을에 유배되던 당시에 지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정양화는 <용인의 옛 땅이름>을 「용인시민신문」에 연재하면서 모현면의 ‘장사래 고개’ 지명과 연관하여 모현면 파담에서 지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용인지역의 향토사를 연구하는 이들 모두 이에 동조하고 있는 편이다. 필자 역시 그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본 발표를 준비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논의가 있어야 한다는 신중론에 이르렀다. 약천이 <번방곡>을 지은 연대는 1674년(현종15)으로 약천이 46세 때였다. 따라서 강릉 유배 당시인 1689년(숙종15, 61세)에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를 지었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전혀 없다. 그리고 약천이 파담에 우산정사를 지은 것은 1680년 전후일 것이다. <번방곡>의 연대가 파담에 우거했던 시기보다 앞설 수 있다. 따라서 모현면 파담에서 지어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당제는 <번방곡>을 분석하면서 “약천은 사람들이 가곡(시조)을 부르던 현장에서 노래를 직접 듣고 이를 한시화 했다.”고 하였다. <동창곡>의 원사인 <동창이 밝았느냐>도 이미 구전되던 시조였을 가능성이 짙다. 약천 남구만 = <동창이 밝았느냐> 식의 고착된 편견에서 벗어나야 진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 한 편에서 약천 남구만의 문학을 가늠하기보다는 그가 만년에 오랫동안 머물었던 파담이 약천 남구만 문학의 산실임을 부각할 필요가 있다. 

용인 지역에 약천이 끼친 영향이 지대함에도, 아무런 행사가 마련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동해시의 향토사가들과 행정당국이 한마음으로 약천마을에 시조공원을 조성하고 시조체험관을 건립하겠다는 등등의 열정이 부러운 것이 사실이다. 약천 남구만이 동해시 약천마을에서는 단지 1년간의 유배 생활을 했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펼쳐놓은 사업은 용인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용인시에는 약천의 많은 유적이 현존한다. 특히 아직까지 파담팔영(琶潭八詠)의 정취를 기억하고 있는 파담마을의 촌로가 있지 않는가. 서둘러 복원하길 기대한다. 묘역과 영정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해서 약천 남구만의 명성이 홍보되리라는 발상은 편협하다. 보다 적극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파담의 정취를 되살려야 한다. 약천이 거처하였던 파담에 우산정사(愚山精舍), 함벽루(涵碧樓), 청은재(淸隱齋), 관란헌(觀瀾軒) 등의 유적이 복원되어지길 촉구한다.


 “시대의 거물 약천 남구만 선생”

■ 주제발표 1: 이정철(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사)

약천 남구만은 1629(인조7)∼1711(숙종37)년에 살았던 조선의 관료이자 정치가였다. 이 시기는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시대 한국 상황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리고 그 시대에 남구만은 이 시대를 관통하는 두 정치적 흐름의 한쪽 측면을 대표했다. 때문에 그를 이해하면 그가 대표한 흐름을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그 흐름과 짝하는 또 하나의 흐름까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그 시대 전체의 이해로 이어질 것이다. 그의 생애는 그의 시대와, 나아가서 조선 후기 전체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남구만은 정약용이나 김정희처럼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 인물이 아니다. 그나마 알려진 것도 “동창이 밝았느냐”로 시작되는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린 시조 한 편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정약용이나 김정희와는 비교될 수 없이 중요한 비중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숙종 시대를 대표했다. 처음에는 남인에 대해 서인을 대표했고, 나중에는 노론에 대해 소론을 대표해서 활약했다. 그는 조선이 왜란과 호란의 길고 험한 길을 막 벗어나기 시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조반정으로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이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하던 시기에 조정에 등장했다. 그는 처음에는 성실하고 유능한 관료로, 나중에는 숙종을 상대로 정론을 펼쳤던 정치가로 활약했다. 그의 재능이 인정받았던 것도 당대 분위기 속에서 가능했고, 그의 왕과 백성들에 대한 헌신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도 시대와 조정이 변화된 분위기가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박학다식한 불세출의 위인”

■ 주제발표 2: 성당제(성균관대학교 교수) 

약천 남구만 선생은 효종·현종·숙종조 국정 전반에 걸쳐 탁월한 경륜가인 동시에, 관각문인으로서 문재를 드러낸 대문장가이며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숙종조에는 영의정에 올라 정계의 중심인물로서 활동했고 소론의 영수로 지목되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정치 업적·경륜 등으로 당시부터 순조조까지 1000여 회 이상 계속 거명된다. 이러한 사실은 약천의 위상과 영향력이 어떠했는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약천은 국가 대사에 쓰는 책문과 반교문 등을 10여 편 찬술했고, 260여 편의 많은 상소문을 짓기도 했다. 책문과 반교문은 정조가 엮은 『사원영화』에 실려 있고, 상소문 명편은 <장소휘고>·<소차가칙> 등에 편집되어 있다. 정조는 약천의 상소문을 “명백하고 적절하여 관각의 나침반이자 나루를 건너는 뗏목으로 삼아야 한다”고 극찬하였다. 여기서 약천이 조선조 관각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약천은 900여 수의 시, 32편의 기문, 18편의 잡저, 90여 편의 묘지명, 17편의 제문 등 다수의 문학 작품을 남겼는데, 시는 <동국시화휘성>에도 수록되어 전하고, 함흥과 북관의 승경을 뛰어난 필치로 묘사한 기문은 <흥왕조승>에도 실려 있다. 또한 우리 가곡을 한시화한 <번방곡> 11수가 있으며, 해박한 역사 지식을 가지고 우리 나라 상고시대의 역사를 고증한 <동사변증>이란 글도 남겼다.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서예에 관한 여러 편의 발문을 지었으며, 좌상남지비·찬성장현광비 등 여러 편의 비문을 쓰기도 하였다.

한편 약천은 문형인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정사로 분주한 와중에도 후학을 지도하여 제자가 100여 명에 달했다. 그 중에 가장 현달한 제자로는 영의정을 지낸 명곡 최석정과 영의정을 지낸 간재 최규서가 있다. 이로 볼 때, 그의 문학은 관료들과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약천이 경륜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 뛰어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정치·국방·역사지리 등에 대한 논문이 나왔을 뿐 문학적으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근래에 약천의 문학론을 검토한 논문이 나오고, 얼마 후 비로소 약천의 문학 전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그의 뛰어난 문학적 성과와 위상이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약천 선생의 문집인 <약천집>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하여 <국역 약천집>이 간행되었다.

약천 선생은 경륜·문학·역사·서예 등 다방면에 뛰어나고 박학다식한 위인이었다. 그러므로 명곡 최석정은 약천을 “박학다식하여 대적할 사람이 없는 불세출의 영웅호걸”이라 하였고, 다산 정약용은 “불세출의 위인”이라고 하였으며, 연암 박지원도 “박학다식”하다고 일컬었던 것이다.

약천이 벼슬할 때는 역사상 정국이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 와중에 네 차례 유배를 가기도 했지만, 영의정에 오르고 몸을 온전히 보존하여 천수를 누렸던 비결은, 그만큼 청렴하고 곧은 절개로 바르게 처신한 데다 남달리 우국애민 정신이 투철했고 나라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이는 숙종으로부터 받은 각별한 지우와, 백성을 잘 다스려 청주·함흥 두 지역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생사당이 세워진 점과, 세상을 떠났을 때 함경도 백성 7000여 명이 함흥에 모여 통곡한 사실이 말해준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많지만 그동안 세상에 잘 드러나지 않은 위인도 많이 있다. 그 중에 한 분을 꼽는다면 바로 약천 선생이라고 단언한다.


“유적과 문화축제 방안 모색해야”

■ 주제발표 3: 안영선(용인문학 편집주간)

약천 남구만 선생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동해와 남해에서의 유배 생활과 용인, 홍성, 서울, 익산, 충주, 광주 등의 생활은 각처에 선생이 삶의 흔적을 남겨 놓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국민 시조인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의 창작지로 용인의 비파담이 가장 유력함에도 불구하고, 동해시나 홍성군, 최근에는 진천군까지 가세하여 작품의 창작지를 주장하고 있어 끊임없는 논쟁이 되고 있다.

용인은 약천 남구만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 생활을 통해 말년을 보낸 곳이다. 약천 선생은 중년 이후 가장 오랜 시간을 용인 모현면 갈담리(파담)에서 지냈다고 한다.  약천 선생이 용인과 연고를 맺은 것은 남사면 창리 화동에 선조들의 묘를 둔 것도 계기가 되겠지만 용인팔경의 하나인 비파담(갈담리)의 아름다운 풍광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약천 선생이 비파담에 살게 되면서 이곳에 후손들이 번창하게 되었고, 지금은 의령 남씨 문충공파의 세거지가 되었다. 용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약천 남구만 선생의 유적으로는 향토유적 제5호인 초부리 묘소와 묘소 입구에 세운 문학비, 향토유적 제53호인 갈담리(비파담)에 있는 별묘, 별묘 안에 있는 문학비, 약천 남구만 선생이 문학 작품으로 담아낸 비파담,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영정 등을 들 수 있다.

강원도 동해시의 심곡동은 약천 선생이 1689년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일년간 유배생활을 한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약천 선생은 심곡동에 들렀다가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터를 잡고 머무르며, 지방민을 위해 서당을 개설하고 학문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동해시는 1980년대부터 약천 남구만 선생에 대한 학술 조사를 시작하였고, 1997년 약천 샘 복원을 시작으로 1998년 약천정 건립, 1999년에는 약천사 복원했으며 약천마을에서 3km 남짓 떨어진 시조의 배경지라고 주장하는 곳에  ‘사래 긴 밭’ 표지석을 세우고, 기념사업으로 해마다  ‘전국시조경창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약천문화마을 조성을 위해 1단계로 13억을 투자하여 약천샘, 약천정, 약천사를 건립했고 2단계로 6억을 들여 시조체험장을 건립했다.

2007년에는 건설교통부의 ‘살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범 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어 국·도비 등 총 85억원의 사업비를 투자, 2009년까지 생태 연못 정비와 약천사 전통 조경 등 약천 남구만 시조마을 만들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약천 선생의 고향인 충남 홍성군 내현리의 거북이마을은 전통 가옥으로 약천초당을 건립하고, 약천초당 앞에 시비를 세웠다. 마을에서는 이 약천초당을 활용한 전원시조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운영하고 있다. 남해군은 2007년 읍 시가지에 테마거리를 조성하면서 유배거리를 만들어, 유배객들의 유배 과정 재현과 유배 생활 중에 지은 시작품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약천 선생은 6개월 간 남해군에 유배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약천 선생이 지은 <제영등망운산(題詠登望雲山)>과 <제영등금산(題詠登錦山)> 등 두 편의 시를 볼 수 있다. 또 남해군은 남해읍 남변리 일원에 약 3만 5000여㎥의 부지를 마련하고 총 사업비 138억원을 들여 2010년 4월 완공 예정으로 유배문학관 건립을 진행하고 있다.

■ 약천문화제 제안

용인지역 축제방안 제안]공식 행사로 ‘약천문학제’를 제안한다. 이는 약천 남구만 선생의 문학사적 위치를 높이고 인물에 대한 이미지 창출을 통해 지역 문학 활성화와 지역 주민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켜 지역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약천문학제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성인들을 위한  ‘약천문학상’ 제정, 초·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약천글짓기대회’, 비파담 별묘를 공간으로 활용한  ‘시조 체험마당’, 약천 선생의 묘소와 문학비, 별묘 등을 연결하는 ‘약천문학기행’ 등을 마련한다면 새로운 테마문학벨트가 형성될 것이다. 또한 약천 선생의 문학 작품을 조명할 수 있는 ‘약천 문학 심포지엄’ 개최, 약천 별묘와 비파담 일대를 성역화한 문학공원 조성과 약천문학관을 개관한다면 용인은 명실상부한 한국 문학의 메카가 될 것이다.

지역축제는 지자체와 민간단체가 함께 어우러져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행사로 거듭날 수 있다. 용인문학회가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약천문학제를 추진하고 있지만 용인시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단체가 참여하는 약천문학제 추진위원회 구성이 필요하다. 용인시와 용인문화원, 용인예총, 용인민예총, 경기문화재단, 의령 남씨 종중 등이 함께 위원회를 구성하여 행사를 추진한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될 것이다. 약천문학제는 용인시민의 문화적 가치에 대한 이미지를 창출하여 정체성을 높이는 좋은 행사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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