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가게가 있는 풍경ㅣ허연

  • 등록 2020.09.04 10: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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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가게가 있는 풍경

                                                       허연

 

석양 아래

 

늙은 노숙자 한 명

물끄러미 빵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추억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지나가는 자동차들

고여 있던 빗물들

뿌려대고

 

죽음과 무척이나 가까운 화단에선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자목련이 지고 있었다

 

허연은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오래 동안 언론사에서 기자로 활동해 온 시인이다. 그의 시에 사회적인 발언이 많은 이유다.

「빵 가게가 있는 풍경」 또한 사회적인 발언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은 어는 봄날, 비가 내린 저녁 무렵이다. 공간은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도시의 빵 가게 앞이다. 주인공은 노숙자다. 비온 날의 노숙은 노숙자에게 작은 시련이다. 그는 허기져 있다. 주린 배를 잡고 들여다보고 있는 빵 가게 안은 갖가지 먹음직스러운 빵들이 진열되어 있다. 노숙자는 빵을 보고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지난날들의 추억을 빵처럼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이다.

지난날들의 추억의 첫 장은 아무래도 가족들일 것이다. 가족들은 어디를 가나 노숙자를 목메어 부르는 간절한 목소리다. 아련하고 아픈 혈육의 생각으로 물끄러미 서 있는 노숙자를 향해 달리는 자동차들이 고여 있는 빗물을 뿌려댄다.

이 시의 비의는 ‘죽음과 무척이나 가까운 화단에선’에 있다. 죽음과 무척이나 가까운 화단은 노숙자가 몇 번이나 뛰어내릴 생각을 했던 곳이 분명하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포기한 죽음의 장소는 자목련이 피어 있는 화단이다. 노숙자의등 뒤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다. 그곳에 피어 있는 자목련이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지고 있는 것이다. 자목련이 노숙자의 은유라면 노숙자는 이미 죽은 영혼이다. 노숙의 생활이 그의 영혼을 스스로 거둔 것이다. 《문학과지성》 간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중에서 김윤배/시인

김윤배 기자 poet01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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