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누군가가 죽였다

  • 등록 2011.02.14 10:4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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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 눈을 의심했다. 지난달 29일 ‘젊은 여성 시나리오 작가가 굶어죽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를 클릭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인터넷 뉴스사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낚시기사’려니했다. 이른바 ‘시츄에이션 코메디(situation comedy)’일 것으로 짐작했다.


국민소득 2만달러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에다 인기작품은 관객 1000만명을 돌파하고 한류 열풍으로 한창 상종가를 치고 있는 게 영화계라는데 도대체 시나리오 작가가 굶어죽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


헌데 그게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이제 32살의 시나오리 작가 최고은씨는 생활고로 인한 굶주림과 평소의 지병 등에 시달리다 숨진 채 발견됐다.
변사처리에 나섰던 경찰과 주변인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서울 인근의 방 하나 부엌 하나짜리 월세방에 살았다. 어렸을 적 부모님이 이혼한 후 가족과의 왕래를 거의 끊은 채 거의 독학하다시피 했다.


다행히 작가적 재능이 뛰어나 영화인을 꿈꾸는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했다. 2006년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격정의 소나타>란 작품으로 ‘단편의 얼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그가 생전에 5편의 시나리오를 썼지만 영화화된 작품은 하나도 없다는 뜻으로 자주 썼던 ‘5타수 무안타’라는 자조적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한국 영화계의 비열한 양극화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산업노조가 실시한 근로 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영화 스태프의 연평균 소득은 2009년에 623만원. 이는 월 52만원꼴로 그 해 1인 가구 기준 49만 845원인 최저생계비를 겨우 웃도는 수준이다.


참여정부는 2006년 영화계의 민원을 수용해 영화발전기금을 신설했다. 정부는 당시 영화 현장 인력의 처우 개선 및 재교육을 통한 전문성 제고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초 취지와는 다르게 이 기금이 쓰이기 시작했는데 지난해의 경우 443억원의 영화발전기금 사업비 중 인적자원 육성과 근로 환경 개선에 쓰인 돈은 전체의 6.1%인 27억 1300만원에 불과했다. 영화계의 경우 대기업과 외국계 자본이 제작과 유통을 장악하면서 부익부빈익빈이 더욱 악화했다. 일부 흥행감독은 대박을 터뜨렸지만 이는 거의 로또나 다름없는 확률이었다. 대부분의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등은 여전히 기아선상을 헤매고 있다.


최고은 작가가 활동한 시나리오업계의 경우 시나리오 1편에 처음 데뷔하는 작가는 3000만 원정도 고료를 받는데 그나마도 영화가 다 완성돼야만 완불이 된다고 한다. 1년에 2편을 팔아도 겨우 생계를 꾸려갈 정도의 상황인 것이다. 그나마 영화판에서 대접을 받는다는 작가가 이정도니 그 밑에서 일하는 조감독, 조명기사, 분장기사, 무대장식팀 등의 처우는 더 열악할 께 뻔하다. 하지만 영화계의 공룡이라는 CJCGV의 매출은 지난해 9월말까지 3,975억원이었고 영업이익은 641억에 달했다.


최씨집 현관입구에는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라는 쪽지가 남아있었다. 최씨를 부검한 경찰은 갑상선 기능 항진증과 췌장염을 앓던 최씨가 수 일째 굶은 상태에서 치료를 받지 못해 숨진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런데 경찰의 발표를 보면 몇가지 궁금증이 남는다. 며칠 굶었다는 게 과연 사인일까 하는 점이다.


보름씩을 단식해도 인간은 쉬 죽지 않는다. 그가 앓아온 병도 불치병은 아니다.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치료약을 복용하면 생존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최씨는 사실상 투약과 밥 먹기를 거부하는 식으로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하지는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유족들에게는 유감이지만 그는 영화계의 부조리와 모순을 스스로 고발하기위해 글 대신 자신의 몸으로 고발성 시나리오를 썼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써 붙인 메모는 사실상 그가 온몸으로 써내려간 유서인 셈이다. 그의 명복을 빌면서 누군가 뜻 있는 이가 있다면 그가 목숨을 던져 절규한 이 스토리를 토대로 그를 기리는 멋진 영화 한 편을 만들어 그의 영전에 헌정하길 기대한다.

용인신문 기자 webmaster@yong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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