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견작가 박범신이 용인시립도서관축제의 <작가와의 만남>에 초청받아 용인을 방문했다. 작가이자 교수인 그는 10여 년 전 명지대 문예창작과가 용인캠퍼스에 있었을 때 용인과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무려 10년 세월을 용인에 살았다.
1993년 인기작가 시절, 그는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던 중 돌연 절필 선언했을 했다. 당시 문단은 물론 언론에서도 대서특필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해 겨울, 밤새 고민을 한 후 그는 비가 내리는 아침 일찍 신문사로 달려가 사장에게 일방적인 연재중단 통보를 했다.
“내 뒷 꼭지에 권총을 들이대고 글을 쓰라고 해도 난 한자도 쓰지 않겠다.”
사실상 작가로서는 죽음을 선언한 것. 인기작가로 누렸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이후 일 년쯤은 관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을 받았단다. 정말 고독해서 울고, 그가 살던 양지면 대대리 한터공방에서 용인공원묘지에 모신 어머니 묘를 찾아 산길로 갔다가 광주 태화산에서 아침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렇게 죽음보다 고독한 세월이 흘러 그는 다시 작가로 부활했다. 바로 용인은 작가로서의 죽음과 부활의 10년 세월을 담고 있는 곳이다.
그 시절, 필자는 지역문인들과 한터공방을 찾아 술을 마셨던 기억이 있다. 굵은 싸인펜으로 글을 쓰고, 술보다는 담배를 더 사랑한 작가. 신문사 주최 백일장 심사위원으로도, 용인문학회 초청강연에서도, 명지대 문창과 학생들과 어울린 골목길 카페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강연이 끝난 후 옛 인연을 빌미로 필자와 용인산수이야기 저자인 이제학 선생과 인근 찻집을 찾았다. 긴 시간 용인이야기를 했고, 끝내 옛 추억을 찾아 운학동과 와우정사까지 우중드라이브를 하게 됐다. 돌아오는 길에 추어탕과 막걸리 한잔까지 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용인과의 인연을 다시 맺고 싶다고 말했다. 나이 먹으면 막걸리 한잔 할 수 있는 벗이 그리워질 것이라고. 내년이면 정년을 맞이한다는 그는 “돌아보니 용인만큼 소중한 문학적 고향이 없었노라”고 말이다.
물론 소설가 중에는 용인을 문학적 고향으로 삼는 이들이 꽤 있다. 한때 밀리언셀러였던 소설 토정비결 작가 이재운도 원삼면에서 문제의 작품을 썼고, 현재 고려대 교수인 소설가 김종성도 이동면에 살다 동백지구로 이사했다. 또 지금은 일산에 살지만, 젊은 작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소설가 천명관도 양지면 출생으로 용인을 문학적 고향이라고 말한다.
이들에 비하면 등단 37년째인 작가 박범신은 원로다. 그는 지난 10년간의 작품 중 <촐라체>, <은교>, <고산자>를 대표작으로 꼽는다. 그동안 수백 권의 소설집을 냈지만, 죽음과 부활 후 자신의 정체성을 담은 갈망의 3부작이란다. 한국적 자본주의의 욕망이 가득한 이 세상을 일갈한 작가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이젠 한국문단이 외면하고 있는 현실 참여적인 작품을 다시 본격적으로 쓰겠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젊은 작가들보다 더 많은 창작품을 쏟아내고 있다. 시 쓴다는 필자 역시 큰 나무 앞에선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는 용인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 앞에 새삼 부끄러워졌다. 무질서하게 변화된 도시와 시골풍경을 보면서 그는 분명 실망했다. 그래도 작가로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그의 마지막 갈망을 위해 용인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니 감사와 위안의 마음이 교차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