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이 만든 명문세가

  • 등록 2001.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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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순례(16) -이석형 묘

모현면 능원리 일대에는 정몽주 선생을 대표로 하는 연일정씨 후손들의 묘와 함께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던 연안이씨(延安李氏) 일가의 묘들이 있다. 연안이씨를 굴지의 명문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바로 세조 때 공신의 한 사람이었던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이었다.
이석형은 어릴 때부터 총명함과 문장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1440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이듬해에 열린 문과(文科)에도 역시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간원 좌정언에 제수되고, 집현전 부교리에 임명되어 14년 동안 집현전 학사로 재직하면서 집현전 응교·직전(直殿)·직제학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445년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 있는 동안 집현전 시절의 동료들인 성삼문 등이 사육신 사건을 일으켰으나 연루되지 않았다. 그 후, 예조참의, 한성부윤, 황해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경기도 관찰사,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만년에는 판중추부사 등의 한직에 있었으나 세조 때의 치적이 인정되어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군되고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필법이 신묘하다는 평을 들었으며 집현전 학사로 있을 때 <치평요람>과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대학연의(大學衍義)>와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 21권, <저헌집(樗軒集)>이 있다. 편저로는 <역대병요(歷代兵要)>와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이 있다.
그의 묘는 정몽주 선생의 묘역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소박한 원형봉토분으로 상석, 문인석, 망주석 등 간단한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고 옥개석이 없는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후손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썼다.
선생의 묘가 정몽주 선생의 묘역에 있게 된 데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선생의 부인은 정몽주의 손자인 사헌부 감찰이었던 정 보(鄭 保)의 딸이었다. 그녀는 풍수지리에 조예가 있어 일찍이 외증조부인 정몽주의 묘소에 왔다가 바로 그 왼쪽 언덕인 지금의 선생 묘소 자리가 명당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친정에 간청하여 그 자리를 자신들에게 주도록 간청하였는데 혹시나 거절당할까 염려하여 밤마다 그 자리에 물을 퍼다 부었다고 한다.
하도 딸의 간청이 집요하고 지극하자 마침내 친정에서 지관을 보내 그 자리를 둘러보게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물이 소아 나오는 걸 보고 별 의심을 하지 않고 그 곳을 못쓰는 땅이라고 여겨 허락하고 말았다. 그녀는 선생보다 먼저 죽어 이 곳에 묻혔고 후에 선생이 돌아가시자 합장(合葬)했다. 그 후 선생의 후손들은 관연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그의 일가는 혁혁한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지금도 그의 묘소 아래에는 조금만 비가 와도 물이 흐르고 항상 습기가 많아 수초들이 자라고 있다. 아마도 그녀에 관한 설화는 이러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 했던가. 자신의 뿌리인 친정 집안보다 사랑하는 남편과 후손들을 위해 현실적인 욕심을 앞세운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이 곳에 뿌리를 내려 명문세가로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니, 후학으로서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용인신문 기자 webmaster@yong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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