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반도에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인 그들은 아스카문화라고 부르는 일본 고대문화의 꽃을 피웠다. 아스카문화는 나라, 헤이안시대로 전해져 일본문화사의 큰 축을 이룬다.
아스카는 지금 면적은 24.08㎢, 인구는 7000명에 지나지 않는 한가로운 시골이다. 이 일대에는 다카마쓰총 고분[高松塚古墳]· 이시부타이 고분[石舞臺古墳]· 아스카사[飛鳥寺] 등 고분과 사적이 15개소나 된다. 1980년 아스카촌[明日香村] 보존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옛 도읍을 보존하도록 하였다.
■ 다카마쓰총 고분(高松塚古墳)
한적한 아스카 시골마을이 일본인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72년 3월에 다카마쓰총고분에서 극채색 벽화가 발굴되면서부터이다.
일본의 고분에서는 처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다시 주목을 끌었는데, 작년 6월 28일, 일본 문화재청이 이 고분의 벽화를 영구보존하기 위해 석실(石室)을 해체해서 이전키로 결정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다카마쓰총 고분은 다카이치(高市)의 서남쪽 사카아이(坂合) 지구 히노쿠마(檜畏)에 있다. 구릉의 남사면에 만들어진 길이 약 18m, 높이 약 5m의 작은 원형고분이다. 매장 주체부는 잘 다듬은 응회암 판석을 이용해서 구축한 횡혈식 석곽(橫穴式石槨)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묘실의 크기는 길이 2.65m, 너비 1m, 높이 1.13m이다.
다카마쓰총의 석실 내부는 도굴로 교란되었지만, 금구나 정(釘)으로 장식되고 옻칠을 한 나무관이 있고, 주요한 부장품으로는 해수포도무늬거울[海獸葡萄文鏡]· 은제대도외장구(銀製大刀外裝具)·금동투금구(金銅透金具)·금동식금구(金銅飾金具) 등이 있었다.
다카마쓰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벽화이다. 석곽 내부는 전면에 회발이를 하였고 천정 및 벽측면에 성수(星宿)·일월(日月)·사신(四神)·인물군상(人物群像)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천정부의 중앙에는 길이 약 0.9cm의 원형 금박을 칠하고 붉은 선으로 별자리를 표현하였다.
동쪽 벽면 중앙 상부에는 금박의 일상(日像)과 청룡(靑龍), 남·북에는 남녀 각 4명의 군상이 그려져 있다. 서쪽 벽면에는 은박의 월상(月像)과 백호(白虎), 남·북에는 남녀 각 4인의 군상이 그려져 있다. 이들 16인의 인물들은 각기 지물(持物)을 들고 있다.
이 벽화는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벽화의 내용 중 사신도(四神圖)가 고구려의 중화진파리 1호분 및 강서삼묘의 대묘·중묘의 것과 유사한 양식과 기법을 보이고 있다.
또 여인들의 색동 주름치마와 머리 스타일 등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여인상과 유사할 뿐 아니라 청룡·백호·주작·현무를 그린 네 벽의 사신도와 흰색 납 안료인 연백(鉛白)을 사용해 벽화를 그린 것도 고구려 양식을 닮았다. 이런 이유 등으로 고분을 축조한 사람은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이라는 학설이 유력했다. 매장된 사람은 40~60세의 장신(長身) 남성으로 생각되며, 부장품이나 벽화의 주제로 보아 왕족(王族)·귀족 등의 유력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 일본 불교의 요람 아스카사(飛鳥寺)
일본에 가장 오래된 사찰이 바로 아스카사이다. 이 절은 스쥰(崇埈) 5년(592)에 금당과 회랑이 조성된 뒤, 스이코(推古)여왕 4년(596)에 목탑이 건립되면서 완성되었다.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원이다. 이 절의 창건에 즈음하여 백제의 성왕(聖王)이 불상과 경전을 보냄으로써 불교가 공인된 이후, 왜국에 백제의 불교문화가 크게 꽃피게 되었다.
아스카사는 고구려와 백제의 양식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건립 당시 쇼토쿠태자가 고구려계 혜자(慧子) 스님과 백제계 혜총(惠聰)스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 절의 건축양식은 고구려의 대표적 가람형태인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 양식이다. 와당(瓦當)을 비롯한 다른 부재는 다분히 백제 양식이다. 현존 건물은 에도(戶都)시대 말기에 소실된 중금당 터에 새로 세워진 것이다. 지금 이름은 안거원(安居院)이다. 이 건물 안에는 스이코 14년에 백제인 구라쓰쿠리노도리(鞍作止利)기 제작하였다는 아스카사 대불이 봉안되어 있다.
■ 아스카시대의 영웅인 소가씨의 이시붓타이
(石舞臺)
아스카의 고적을 돌아다니다 보면 거대한 돌무대가 눈에 띈다. 백제 사람인 소가노우마고(蘇我馬子)의 무덤이라고 한다. 소가노우마고는 아스카시대의 영웅이다. 세 명의 천황을 등극시켰을 만큼 절대 권력가였다. 소가씨가 죽은 것은 645년 무렵이다.
이 돌무덤은 고대 백제의 석재 건축의 우수성을 말해준다. 지금의 대형 기중기로도 축조가 어려울 정도의 바위 수십 개를 조립해서 만든 횡 식 고분(橫穴式古墳)이다.
이 돌무대 고분은 한 변의 길이가 20미터나 되는 대규모의 사각 형태이다. 본래는 석실을 조성하고, 이 거대한 돌덩어리로 위를 덮은 다음, 흙으로 능(陵)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근처의 풍경은 마치 한국의 경주에 있는 신라왕릉 주변을 구경하는 것 같다. 이 무덤이 언제부터 지금의 상태로 노출되었는지 알 수 없다. 1933년, 35년 두 차례 발굴하였으나, 석실 내부에서는 석관조차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는 봉분의 흙은 모두 없어지고 묘의 내부를 이루는 거석 바위들의 구조물만 남아 있다. 가장 큰 바위는 70톤이 넘는다고 한다. 그 시대에 이러한 규모의 바위를 어떻게 운반하였을까? 가까이 다가서서 바라보면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글·사진: 홍순석 hongssk@kangnam.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