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자리, 그 책임의 무게

  • 등록 2025.07.07 09:2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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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영(한학자)

 

용인신문 | 『춘추(春秋)』를 보면 ‘봄 3월’, ‘여름 5월’처럼 날짜만 덩그러니 적혀 있을 뿐, 군주의 행적이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관(史官)은 왜 내용 없는 날짜를 역사에 남겼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서늘한 뜻이 담겨 있다. 하나는 군주가 그날, 혹은 그달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아 기록할 가치조차 없었다는 통렬한 비판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관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군주의 공백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증언이다. 붓끝으로 세상을 기록하는 사관에게 침묵은 가장 무서운 질책이다. 이처럼 기록되지 않은 행간이야말로 군주를 향한 가장 준엄한 경고를 담은 셈이다.

 

한 일이 없어 역사에 남길 행적이 없는 군주라면, 정치를 알고 모름을 떠나 존재 가치를 의심받아 마땅하다. 그런 지도자를 둔 백성의 삶은 하루하루가 고난일 수밖에 없다. 본래 정치란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사람을 이해하며, 백성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물꼬를 터주는 일이다. 그렇기에 정치에는 도덕과 경제라는 두 개의 기둥이 바로 서야 한다. 여기서 도덕이란 단순히 개인의 윤리를 넘어 사회 전체의 신뢰와 공정을 세우는 일이며, 경제란 백성의 먹고사는 문제, 즉 민생(民生)을 안정시키는 일이다. 도덕이 무너지면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고, 경제가 파탄 나면 백성의 삶이 무너진다. 나라를 다스리는 치자(治者)는 이 두 가지를 바로 세워야 할 지엄한 의무를 지닌다.

 

이를 위해서는 지도자의 곁에서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신하가 반드시 필요하다. 맹자는 이들을 ‘임금도 함부로 어찌하지 못하는 신하’라 칭했다. 바로 그 시대의 양심이자 지성이었던 공부한 자들이다. 그들은 평생 쌓아온 학문의 가르침과 양심에 따라 흰 것을 희다 말하고, 검은 것을 검다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지도자의 귀에 달콤한 말만 속삭이는 간신이 들끓는 조직은 반드시 썩어 문드러지기 마련이다. 국가의 건강성은 비판의 목소리를 얼마나 용납하고 경청하는지에 달려있다.

 

『논어』의 한 구절은 공부한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웅변한다. 공자 나이 72세 무렵, 제나라 신하 진성자가 군주를 시해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목욕재계하고 조복(朝服)으로 갈아입은 뒤, 노나라 애공에게 나아가 진성자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애공이 실권자인 삼환씨에게 먼저 고하라 하자, 공자는 그들에게도 찾아가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공자 역시 약소국이 강대국을 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그는 공부한 사람으로서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패륜적 불의를 묵과할 수 없었고,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는 군주의 부도덕을 외면하지 않고, 경제가 무너져 백성이 고통받는 현실을 방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지식인의 책무임을 보여주는 실천적 가르침이다.

 

반면, 이상적인 군주는 어떠해야 하는가. 주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은 현자들의 간언에 귀 기울이며 밥 먹을 틈도 없이 국정을 돌보았다. 그 결과 백성의 삶은 빠르게 안정되었지만, 정작 무왕 자신은 과로로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폭군이 사라지고 새 시대가 열려 이제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백성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비극이었다. 군주의 헌신이 백성의 평안과 직결되지만, 그 무게는 때로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가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경』은 순임금이 즉위하여 관리들의 공적을 거듭 심사하고 무능한 자는 내쳤으며, 성실한 자는 발탁했다고 전한다. 이는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공정한 시스템을 세우는 것임을 말해준다.

 

무왕의 과로사와 순임금의 엄정한 인사는 오늘날 지도자의 자리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분명히 말해준다. 지도자에게 사생활이란 있을 수 없으며, 휴가나 개인적 안위를 먼저 챙기는 것은 더더욱 가당찮다. 그런 것을 원한다면 언제든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될 일이다. 지도자의 자리는 권력을 향유하는 곳이 아니라, 오직 국가 공동체의 안녕과 국민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불태우는 희생과 책임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송우영 기자 iyongin31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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