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태국에 왔다. 태국은 내 첫 배낭여행지로, 고등학교 졸업 직후 가장 친한 친구들이랑 여행했다. 12월 31일에 서울에서 오는 비행기를 타서,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또 남부로 가는 12시간짜리 밤버스를 탔다. 지금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지옥의 스케줄이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자다깨다 자정이 지난 걸 보고 서로에게 “스무살이 된걸 축하해-!” 하며 씩 웃고는 다시 잤다. 빨빨거리며 남부부터 북부, 라오스까지 다녔다. 처음 만나는 새로운 음식들과, 친절한 사람들, 마법같은 만남들이 여전히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용인신문 | 계속 이동을 하며 지낸 지 거의 2년차다. 매일 바뀌는 상황과 해보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을 찾아 떠나는 날들이었다. 매일이 모험처럼 지나갔다. 새로운 음식,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장소와 문화들. 지난 두 달은 이제 어딘가에 진득하니 있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완전한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많이 해소된 것 같다. 바람은 충족되면 새로운 형태로 바뀌나보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한 공간에서 지내면서 루틴을 되찾는 것. 여행을 시작할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은 게 달라졌다. 그래서 한국에 다시 돌아가는 게 조금 무섭게도 느껴진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새롭게 느껴질 것이고, 그런 지점들이 기대된다. 한국으로 들어가기 전 징검다리 역할로 태국 치앙마이에 한 달 동안 방을 빌려 지내고 있다. 첫날의 일정은 망고와 람부탄, 망고스틴 사기. 호주에서 물 한 병이 4000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망고 1킬로 1500원은 믿기지 않는 가격이다.
용인신문 | 사람을 만나 좋은 점은 서로에게 배운다는 것이다. 내게 없는 모습을 보며 닮고 싶은 부분을 찾아내고 존경하게 되고, 가지고 싶지 않은 부분을 보며 반면교사를 삼는다. 가장 질투나는 사람은 언어를 세련되게 쓰는 사람이다. 이해할 수는 있지만 따라하기는 쉽지 않다. 시간이 지나며 소통의 오류가 줄어들고, 쌓이는 기억들이 소중해진다. 친구를 만드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만큼, 좋아하는 걸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너무 반갑고 감사하다. 이것도 시절 인연이겠지만,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더 귀하게 여겨야지.
용인신문 | 호주 사람들은 약간 틱틱대는 아저씨들 같다. 바로 친해지기는 어렵지만 신뢰를 쌓다 보면 인정해 주는 분위기. 한번 마음을 열면 이래저래 챙겨준다. 언어가 다르니 처음엔 몇 번이고 못 알아들었다. 말하는 속도가 빠르기도 하지만 쓰는 표현도 완전히 다르다. 자기 상황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고 최고의 칭찬이 “괜찮네!”인 느낌. 떠날 때가 되니 괜히 고맙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매번 떠나는 여행자로서 이런 마음이 들 만큼 고마운 사람들이 생겼다는 건 기쁜 일이다. 고마웠어!
용인신문 | 멀리 있으니, 가족이 보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아플 때, 길을 잃은 것 같을 때. 집에 같이 살 때는 서로 티격태격하기 일쑤였는데 멀리 있으니 애틋해진다. 한 달에 한 번쯤 안부 전화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 하는 게 소중하다. 날이 갈수록 부모님의 시야를 더 이해하게 되면서, 더 감사해졌다. 오늘 아침을 차려 먹으며 전화했다.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평소에는 감사를 표현하기 부끄러워서 잘 전하지 못하지만, 이번 달에는 더 자주 전화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한다.
용인신문 | 나의 첫 배낭여행, 18살 태국. 그때도 가방 한쪽에는 텐트가 있었다. 텐트와 매트, 침낭은 어딜 가나 먼저 챙기는 필수품이었다. 작년 일본에서 해먹캠핑을 하는 친구들을 처음으로 만났다. 큰 부피를 차지하는 텐트 없이, 작은 매트와 해먹으로 캠핑을 하는 방식이다. 텐트는 언제나 평평한 노면을 찾아야 하고, 추울 때면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 때문에 좋은 매트가 없으면 춥다. 해먹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지는 않을까 궁금했던 나는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냈다. 해먹캠핑은 나무나 구조물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호스텔에서 지낼 때도 해먹을 걸 장소만 있으면 나만의 편안한 공간으로 쓸 수 있다고 했다. 그 이후로 시도해 본 해먹캠핑. 놀랍게도 텐트에서 자는 것보다 허리가 더 편안하다. 여러 번 시도해 보며 적절한 각도를 찾아야 한다. 모기를 막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강구가 필요하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작은 짐을 유지하기 최고여서 한동안은 해먹캠핑을 고수할 것 같다.
용인신문 | 페스티벌에서 그림 그리기 워크샵에 참가했다. 오랜만에 그리는 캔버스 그림. 한시간을 어떻게 진행할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참여했다. 그림에 자신 없는 참가자들도 모두 이끌고 갈 수 있는 스킬을 배웠다. 진갈색의 아크릴 물감을 묽게 만들어 필름으로 캔버스에 문지른다. 산호같기도 하고 비같기도 하고 나무와 돌같기도 한 헝상이 만들어지고 어느순간 멈춰 어떻게 보이나 관찰했다. 그 안에서 보이는 것들을 더 확실하게 만들어 나가는 방법. 그리고 싶은 것이 없을 때도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이라 좋았다. 다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 자기 기술을 나누는 사람들은 밝게 빛난다.
용인신문 | 시드니 근처 블루마운틴에 왔다. 절벽과 유칼립투스 나무가 가득한 이 산은 무려 5억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름처럼 새벽에 보면 파란색으로 산이 보인다. 우리 셋은 캠핑할 만한 동굴을 검색했다. 관광객들이 그리 많이 오지 않는 지역을 찾았다. 삼십 여분쯤 걸어 도착한 동굴, 전에 온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작은 모닥불 자리가 있었다. 다른 방향으로 뚫린 입구는 노을과 별을 충분히 보여줬다. 호일로 싼 감자와 고구마를 굽고 가벼운 파스타를 해 먹었다. 지난 몇 달간 사람을 계속 만나느라 힘들었는데 며칠간 조용히 자연에 머무르니 편해진 것 같다.
용인신문 | 눈을 감고 제시어를 주면 그것이 그림 혹은 사진처럼 그려지는 사람이 있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사과’라고 한다면 나는 머릿속에 사과가 그려진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책을 읽으면서 펼치는 상상의 나래가 그렇게 즐거웠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의 성격과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는 온 세상 사람들이 그런 줄 알았다. 귀가 특화된 사람들을 만났다. 소리들을 잡아내고 재미를 느끼는. 내게는 보이지 않는 음악의 층들을 선명히 보는 사람. 높은 음들이 어떻고, 낮은 음이 어떻다며 눈을 빛내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각자의 세계가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다시 한번 느꼈다. 나는 그 세계를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런가 보다 할 뿐.
용인신문 | 시드니에 히치하이킹으로 내려왔다. 남미에서는 시도해 볼 엄두도 못 냈던 히치하이킹. 길에서 엄지손가락을 흔들어 같은 방향으로 가는 차를 얻어 탄다. 유럽에서는 히치하이크하기 쉬운 위치를 표시해 놓은 위키(사전)도 있을 정도로 여행자들이 자주 시도하는 방법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10시간 떨어진 시드니 근교. 몇 번의 작은 히치하이킹으로 큰 트럭들이 멈춰 쉬는 휴게소에 도착했다. 목표는 시드니나 멜버른으로 가는 트럭! 운전자들에게 가서 인사하고 물어봤다. 처음에는 떨렸지만, 몇 번의 인사 후에는 편안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우리 여행하고 있는데 시드니 쪽으로 가? 회사에 소속된 트럭들은 회사 내규로 태워줄 수 없다고 했다. 두 시간 여의 시도 끝에 그리스에서 온 코스타를 만났다. 육 년이나 호주에 살았지만, 여전히 짧은 영어로 우리를 태워줬다. 그리스 음악을 들으며 한 번에 시드니까지 올 수 있었다. 트럭에서 내려다본 차들은 엄청 작아 보였다.
용인신문 | 움직이는 집(우리의 자동차이자 집)이 삐그덕 된지 좀 되었다. 얼터네이터가 차 배터리를 충전하지 못해서 바꿔야 했다. 1997년에 만들어진 자동차라 이곳저곳 아픈 곳이 많다. 어제는 요상한 기름 냄새가 나서 엔진오일을 보충했다. 마침내 정비공에게 가는 길, 차체가 덜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아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도하며 가고 있었다. 15분 남았다! 할수 있어! 하는 순간 의자 밑 엔진에서 하얀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고속도로 위. 으악 일단 출구로 나가자!! 연기는 점점 심해지고 내려와 일단 차를 세웠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렉카를 불러 정비공의 집으로 향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 그리고 집없는 생활 시작이다.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용인신문 | 예전부터 언젠가 해보고 싶었던 생활은 밴라이프였다. 봉고차 뒤를 고쳐 침대와 작은 부엌, 짐들을 넣을 서랍들을 만든 차. 어디라도 주차하는 곳이 앞마당이 되는 차. 호주에 오니 이렇게 생활하는 사람이 많았다. 오지에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에는 삼백 대가 넘는 차가 온다. 모두 차에서 지내는 건 아니지만 최소 절반 이상의 차들은 침대를 가지고 있다. 땅이 작은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아홉 시간씩 하루 만에 운전하는 호주에서는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주차할 곳이 많아서 그런지, 일이 년만 지낼 수 있는 비자로 온 외국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자주 볼 수 있다. 나도 친구 덕에 그 맛을 봤다.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주차하고 아침 해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면 꽤나 행복하다. 숙소 값이 들지 않으니 좋은 방식의 여행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