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 김윤배 새벽 산자락이다 거미줄에 이슬이 수없이 매달렸다 이슬마다 나무들이 들어있다 숲이 들어 있다 산맥이 들어 있다 바람이 들어 있다 바람은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그간 시집 ‘겨울 숲에서’ ‘떠돌이의 노래’ ‘강 깊은 당신 편지’ 등과 장시집 ‘사당 바우덕이’ ‘시베리아의 침묵’, 산문집으로 ‘시인들의 풍경’, 평론집 ‘김수영 시학’, 동화집 ‘비를 부르는 소년’ ‘두노야 힘내’ 등 다양한 저서를 펴냈다.
종 種 박설희 쓸쓸함과 막막함 사이에서 오늘의 물결이 닿은 곳 짝짓기를 거부해 후손을 남기지 않았다는 땅거북, 외로운 조지 마지막 종種으로 남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우주탐사선 파이어니어 10호는 우리 외에 지각 있는 존재를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외롭다 등의 메시지를 담은 금속판을 싣고 우주로 날아갔다 ‘외롭다’는 마음을 우주인은 이해할까 검은 우주 속 단 하나의 종, 지구인 긴 밥주걱처럼 생긴 부리를 물속에서 휘젓는 멸종위기종 저어새도 도무지 먹이 활동에는 적합하지 않은 부리를 가진 나도 지구의 가장자리에 정박해 있는데 오늘도 난민처럼 지구 밖을, 별들을, 우주 너머를 기웃거리다 잠이 들 것이다 약력: 강원 속초에서 태어나 2003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꽃은 바퀴다』 『가을을 재다』, 산문집 『틈이 있기에 숨결이 나부낀다』 등이 있다.
듣는 사람 이시영 좋은 시인이란 어쩌면 듣는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깊은 산 삭풍에 가지 부러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놀라서 달음박질치는 다람쥐의 재재바른 발자국 소리도 조심조심 들을 수 있다 때론 벼락처럼 첨탐 높은 교회당을 때리는 야훼의 노한 음성도 어릴 적 볏짚 담 너머 키 작은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도 함께 들을 수 있다 좋은 시인이란 그러므로 귀가 쫑끗 솟은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잉크병 얼어붙은 겨울밤 곱은 손 불며 이 모든 소리를 백지 위에 철필로 꾹꾹 눌러쓸 것이다 약력: 전남 구례 출생하였고,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월간문학》 제3회 신인작품 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정지용 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지훈상, 백석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개망초꽃 안도현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 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약력: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등단.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외 다수.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는 15개국 언어로 해외에 번역 출간. 석정시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윤동주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노크 김은령 물 위에 앉은 꽃 무연, 무연히 바라보는데 못 전체가 수런수런 일렁거렸다 깊은 곳에서 수면을 치는 어떤 파동이 있었다 스스로 환한 꽃, 꽃! 둥근 잎 아래 누군가 살고 있어 그가 물 위로 건져 올린 자명등이었던 것 하령지에 와서 수련 구경하다가 찰방찰방 맨발로 걸어 들어가서 부유하며 잠든 연자를 깨운 그 주인공을 불러보았다 한 세계를 보이시는 당신 거기 계세요? 김은령: 경북 고령 출생. 1998년 《불교문예》 등단. 시집 『통조림』, 『차경』, 『잠시 위탁했다』와 불교 장편소설 『일연, 달빛으로 머물다』 등이 있다.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약력: 만해 한용운(1879~1944)은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이자 평생 지조를 지킨 독립운동가, 승려, 저항시인이다. 1926년 한국 문학사의 불후의 명작인 시
탁본 수완 내가 네 안의 나를 볼 때 너는 내 안의 너를 본다 먹지로 탁본을 뜬 너와 나는 팔만대장경을 새긴 경판 전남 신안 출생, 1973년 출가 (해인사 등에서 정진) 1991년 『문학공간』 신인상 등단 현대불교문인협회 결성 계간 『불교문예』 및 『불교와 문학』 발행인 현대불교문학상 제정 및 운영위원장 (1996년~) 시집 『하늘 빈 마음』, 『이내의 끝자리』, 『향기는 아직 찻잔에 남았는데』, 『지리산에는 바다가 있다』, 『유마의 방』
검은 빵 윤희경 그날의 식탁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늘과 온기 사이, 내가 앉은 자리만 미세하게 움푹했다 나는 식은 국처럼 조용히 가라앉았다 혀끝의 작은 가시들이 들썩이며 마음의 밑바닥을 긁었다 입술을 떠난 말은 빛으로 번질 수 있을가 오래 씹을수록 질감이 돋아나는 검은 빵 목을 잠시 멎게 하는 단단한 결 묻지 않기로 한 울음이 빵 속에 숨어 있었다 먹다 남긴 하루 곁에 빵 한 조각이 굳어 있었다 시집 <말이 사라진 자국> 중에서 약력: 2022년 재외동포문학상 제10회 경북일보문학대전 제9회 동주해외작가상 수상 시집 『대티를 솔티라고 불렀다』
토마토론(論) 김택희 피비린내다 눈앞 번쩍하더니 눈물 솟구친다 급히 베어 문 붉은 문장들 무심코 살지 말라며 한 방 날린다 생살 너덜거린다 방방의 씨앗들 왈칵 아린 말을 쏟아 낸다 김택희 2009년, <유심>으로 등단 시집『바람의 눈썹』 『눈 오는 날의 염소』
멸종 주영헌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인류는 멸종을 예약했습니다. 마지막 사랑의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류는 완벽한 멸종을 예약하고야 만 것입니다. 벼락 맞을 각오로, 당신이 사랑을 싹틔우지 않는다면 * 브라질 국립원주민재단은 2022년 7월 외부 세계와 접촉을 차단하고 홀로 브라질 정글에서 생활하던 한 부족의 마지막 원주민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그는 지난 26년간 아마존 정글 깊숙한 타나루 원주민 지역에서 홀로 살았다고 전해지며, 세계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주영헌 약력 2009년 계간 『시인시각(현 시인동네)』로 등단. 시집으로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 『당신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인류는 멸종을 예약했습니다』가 있다. 도서관과 동네 책방의 시 낭독회로 독자를 만나고 있다.
우리는 멸종하지 않는다 유병록 한집에 살고 한 침대에서 잔다고 같은 꿈을 꾸는 거 아니더라 손잡고 걸어간다고 같은 곳에 도착한다는 보장은 없더라 조금 닮았고 많이 달라서 나란히 앉아서 일하고 점심 먹는다고 저녁 풍경이 비슷하지는 않더라 거리에서 함께 손 높이 든다고 언제까지고 나란히 갈 수는 없는 노릇이더라 갑자기 낯설어진 옆 사람을 발견하고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며 상대를 탓하고 자신을 반성하지만 오해는 반복되고 그리하여 우리는 멸종하지 않는다 유병록, 『우리는 멸종하지 않는다』, 창비 , 2026년 약력: 198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산문집 『안간힘』 『그립소』 등이 있다.
영정사진 송시올 뱃고동 소리로 귀를 여는 오도리 마을회관 앞 볕 좋은 공터 한 자락 굽은 허리 꼿꼿이 편 채 저승길 훨훨 앞장세울 사진을 박는다 두런대는 수평선에 어깨 나란히 하고 사진 미리 찍어두면 천수만수 누린다는 말보다 공짜라는 말에 혹해 앉은 허리 굽은 우리 할매 갈매기 눈썹이 여간 우습다 모래톱 잠방대는 수평선에 어깨선 맞추고 셔터 소리 막걸리 사발마냥 찰칵 돌아 팔순 생애 울퉁한 손 마주 잡고 손으로 비벼 바른 연지 불콰하게 물결 곱다 썰물로 밀려나온 푸른 청춘이 생의 끝동에 붙이니 칼라가 되고 생의 말미에 붙이면 흑백이 되는 저승을 향해 활짝 웃고 있는 후렴구 뭉게구름 사이 고개 내미는 하현달 솜털 구름 찰칵 한방 끼워 넣었다 약력: 1963년 충청남도 논산 출생 2004년 포항 불빛축제 장원 수상 후 작품 활동 시작 2022년 '문학청춘' 시부문 신인상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