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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넷플릭스 ‘들쥐’, 남의 얼굴을 한 내가 나타났다

‘손톱 먹은 들쥐’ 옛 설화, 현대의 신분·재산·인증 사회로 옮겨왔다
류준열 1인 2역·설경구·이규형 추격전…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것은 얼굴인가 기억인가
타인의 삶을 탐내는 욕망에서 존재의 불안까지…결국 “나는 무엇으로 나인가”를 묻는 스릴러
내 얼굴을 훔친 존재가 ‘나’보다 더 나답게 산다면…넷플릭스 ‘들쥐’가 묻는 것

 

용인신문 | 누군가가 내 얼굴을 하고 내 집에서 살고 있다. 내 이름으로 돈을 쓰고, 내가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은 오히려 그를 ‘진짜 나’라고 믿는다. 정작 진짜인 나는 휴대전화의 지문 인증조차 통과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때 ‘나’라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더 나아가 내 얼굴과 이름, 재산과 인간관계를 모두 빼앗겼는데도 나는 여전히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넷플릭스 신작 ‘들쥐’는 바로 이 섬뜩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의문의 존재 ‘들쥐’에게 이름과 얼굴, 신분과 재산, 사실상 자신의 인생 전체를 빼앗긴 소설가 문재가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추격에 나서는 이야기다. 배우 류준열이 문재와 그의 얼굴을 훔친 들쥐를 함께 연기하고, 설경구가 사채업자 노자, 이규형이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순용을 맡는다.

 

손톱 먹은 들쥐, 디지털 시대의 괴물이 되다


작품의 뿌리는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옛이야기다. 사람이 깎아 버린 손톱을 들쥐가 먹으면 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다는 이른바 ‘손톱 먹은 들쥐’ 설화다. 어릴 때 들으면 기괴한 민담이지만 ‘들쥐’는 이 이야기를 단순히 현대적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손톱이라는 ‘인간의 일부’를 먹고 사람이 되는 괴담을, 개인정보와 생체인증, 금융기록과 사회관계망이 한 인간을 규정하는 시대의 정체성 공포로 바꿔놓는다.


주인공 문재는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돼 살아온 소설가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일상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모바일 뱅킹에 접속하려 하지만 자신의 지문이 인식되지 않고, 자신이 알던 사람들조차 그를 낯설게 바라본다.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 동안 누군가는 치밀하게 그의 자리로 들어가 이름과 신분, 돈과 인간관계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문재에게 필요한 것은 범인을 잡는 일만이 아니다. 먼저 자신이 ‘진짜 문재’라는 사실부터 증명해야 한다.


여기에 돈 때문에 문재를 뒤쫓던 사채업자 노자가 끼어든다. 돈을 받아야 하는 노자 역시 ‘진짜 문재’를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되면서 적이었던 두 사람은 기묘한 공동운명체가 된다. 형사 순용은 이들의 추격과는 별개로 들쥐의 실체와 사건의 진실을 파고든다. 추격전과 육탄전, 범죄 스릴러의 외형을 갖췄지만 ‘들쥐’가 진짜 겨누는 곳은 그보다 깊다.

 

 

“나는 누구인가”…스릴러가 철학이 되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작품은 이 오래된 철학적 질문을 한 단계 더 잔인하게 바꾼다.


“나보다 더 나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나인가.”


‘들쥐’의 공포는 괴물이 사람으로 변한다는 데 있지 않다. 더 무서운 것은 세상이 가짜를 진짜라고 인정하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흔히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한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주민등록번호와 은행계좌, 휴대전화, 지문과 얼굴인식, 부동산과 금융기록, 직장과 인간관계가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증명한다. 그런데 그 모든 기록이 다른 사람을 가리키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철학자 존 로크는 인간의 동일성을 육체보다 기억의 연속성에서 찾았다. 어제의 일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오늘의 내가 이어받는다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이 논리를 따른다면 문재는 분명 문재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들쥐’는 여기서 다시 묻는다. 아무도 그 기억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아무리 “내가 나다”라고 외쳐도 은행과 국가와 가족과 친구가 다른 사람을 나라고 인정한다면 나는 사회적으로 여전히 존재할 수 있는가.

 

 

인간은 혼자서 ‘나’가 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개인 내부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사람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도 존재한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아들, 친구가 기억하는 친구, 회사가 기억하는 직원, 국가가 기록한 시민이 겹쳐지면서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들쥐’의 진짜 공포는 누군가 내 얼굴을 훔친 데 있지 않다. 타인들이 그를 나라고 믿기 시작하는 순간에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인정으로 존재한다. 그 인정이 사라지는 순간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유령이 될 수 있다.

 


현대의 들쥐는 ‘손톱’ 대신 데이터를 먹는다


이 때문에 오래된 ‘손톱 먹은 들쥐’ 설화는 오히려 디지털 시대에 더 현실적인 공포로 읽힌다. 옛이야기에서 손톱은 인간의 일부였다. 그것을 함부로 버리면 들쥐가 먹고 나의 모습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손톱은 무엇일까. 얼굴 사진, 지문, 음성, 주민등록번호, 카드 사용 내역, 위치정보, SNS 기록, 검색 기록일 수 있다.


우리는 은행에서 비밀번호로 나를 증명하고, 스마트폰에서는 얼굴과 지문으로 나를 증명한다. 인터넷에서는 계정과 활동 기록이 나를 대신한다. 현대의 들쥐는 굳이 손톱을 먹을 필요가 없다. 데이터를 먹으면 된다. 내 사진과 목소리, 생활패턴과 금융기록, 인간관계까지 충분히 확보한다면 누군가는 현실의 나보다 더 쉽게 세상 앞에서 ‘나’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들쥐’는 단순한 도플갱어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 데이터로 복제되는 시대에 존재의 원본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야기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류준열이 문재와 들쥐를 모두 맡은 1인 2역 설정도 이 철학적 질문을 강화한다. 같은 얼굴을 가진 두 사람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관객은 무엇으로 그들을 구분할 것인가. 외모가 같다면 기억으로 구분해야 할까. 기억까지 비슷하다면 행동으로 판단해야 할까. 혹은 주변 사람들의 인정이 더 중요한 것일까.


이 질문은 철학에서 유명한 ‘테세우스의 배’ 역설과도 닿아 있다. 오래된 배의 낡은 부품을 하나씩 새것으로 교체해 마침내 모든 부품이 바뀌었다면 그 배는 여전히 처음의 배인가라는 질문이다. 인간에게 적용하면 더 복잡해진다. 이름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고, 사회적 지위를 빼앗기고, 가족과 친구마저 다른 사람을 나라고 믿게 된다면 마지막까지 남는 ‘나’는 무엇인가.


기억인가. 의식인가. 육체인가. 살아온 시간인가.


‘들쥐’는 여기에 쉽게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조금씩 흐린다. 만약 가짜가 진짜보다 더 성실하게 가족을 돌보고, 더 다정하게 친구를 대하고, 사회적으로 더 ‘그 사람답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누구를 진짜라고 불러야 하는가. 진짜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 인간의 삶에 대한 권리가 영원히 보장되는가라는 불편한 문제도 여기에서 생겨난다.

 

 

타인의 삶을 탐내는 순간, 욕망은 폭력이 된다

 

작품의 또 다른 층위에는 욕망이 있다. 들쥐는 타인의 얼굴만 훔치는 존재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삶 자체를 원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은 인간에게도 전혀 낯선 욕망이 아니다. 누구나 한 번쯤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한다. 더 많은 돈, 더 좋은 직업, 더 멋진 외모, 더 사랑받는 인생을 보며 “저 사람처럼 살아봤으면” 생각한다.


소셜미디어는 이런 욕망을 끊임없이 증폭시킨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과 비교한다. 여행, 집, 직업, 사랑, 가족의 행복을 보며 부러워한다. 그러나 대개 인간은 부러워하는 데서 멈춘다. ‘들쥐’는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아예 그 사람이 되면 어떨까.


그 순간 부러움은 욕망이 되고, 욕망은 침범이 된다. 타인의 삶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결국 타인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폭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 속 들쥐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인간 안에 숨어 있는 욕망을 극단적으로 확대해 보여주는 거울에 가깝다.

 

 

괴물의 얼굴에서 인간을 보게 될 때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진짜 괴물은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들쥐를 악으로 규정한다. 남의 얼굴과 삶을 훔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괴물이 인간처럼 사랑하고 후회하며 관계를 맺는다면 그는 끝까지 괴물일까. 반대로 인간이 타인의 것을 탐내고,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삶을 파괴한다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그랬듯,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묻는 이야기는 결국 언제나 인간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괴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괴물의 얼굴에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들쥐’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들쥐는 인간이 되고 싶어 인간의 얼굴을 훔친다. 그러나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반대의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얼마나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모든 것을 빼앗긴 뒤에도 ‘나’는 남는가


인간은 평생 ‘나’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정작 ‘나’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몸은 계속 바뀌고, 성격도 변하며, 기억은 사라지고, 가족과 직업과 사회적 위치도 달라진다.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거의 모든 것이 달라졌는데도 우리는 둘을 같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무엇인가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들쥐’는 바로 그 믿음을 공격한다.


얼굴도, 이름도, 돈도, 직업도, 인간관계도 사라진 뒤에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정말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작품의 가장 무서운 장면은 반드시 추격이나 폭력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 얼굴을 한 사람이 내 자리에 앉아 있는데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순간이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간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나’라는 존재가 훨씬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결국 넷플릭스 ‘들쥐’는 쥐가 사람으로 변한다는 오래된 괴담을 빌려 가장 현대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얼굴도, 이름도, 주민등록번호도 아닐지 모른다. 그렇다고 기억 하나만으로 충분한 것도 아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내가 기억하는 나와 타인이 기억하는 나, 사회가 기록한 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선택하는 행동들이 겹쳐 만들어지는 것일 수 있다.


누군가 내 모든 것을 훔쳐갔을 때 마지막까지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들쥐’가 끝내 관객에게 남기는 질문은 단순하다.


“당신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그리고 그 질문 뒤에는 더 오래 남는 문장이 따라온다.


얼굴도 이름도 돈도 타인의 인정도 모두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는 것, 그것이 있다면 아마 우리가 평생 ‘나’라고 불러온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