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16 (토)

  • 맑음동두천 25.3℃
  • 맑음강릉 29.2℃
  • 맑음서울 25.2℃
  • 맑음대전 25.1℃
  • 맑음대구 25.3℃
  • 맑음울산 25.7℃
  • 맑음광주 24.9℃
  • 맑음부산 22.0℃
  • 맑음고창 24.8℃
  • 맑음제주 21.5℃
  • 맑음강화 23.2℃
  • 맑음보은 23.5℃
  • 맑음금산 24.5℃
  • 맑음강진군 24.6℃
  • 맑음경주시 26.3℃
  • 맑음거제 23.3℃
기상청 제공

기획 연재2 - 저출산 시대 극복을 위한 '서주태 원장의 건강칼럼'

숨이 멎은 고환, 시간을 건져 올리다

서주태 서주태비뇨의학과의원 대표원장(연세대 의대 졸업·전 대한생식의학회 회장·전 제일병원 병원장)

(그림 : AI 생성)

 

용인신문 | 36년 전, 신촌의 한 대학병원에서 작디작은 생체조직이 필자의 병원으로 응급 이송되어 왔다. 처참해서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다름 아닌 모래와 혈액이 뒤엉킨 고환 조직이었다. 고환은 단순한 장기가 아니다. 정자를 생성하는 정세관이 중심을 이루고, 그 안에서 세르톨리 세포가 정자의 생성과 성숙을 지지하고 조절하는 기능을 담당하며, 주변에서는 라이디히 세포가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을 분비해 이 과정을 뒷받침한다. 정세관을 둘러싼 미세혈관망이 영양과 산소를 끊임없이 공급해야 이 모든 요소가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구조다.

 

불의의 사고로 고환이 파괴되었다는 건 단순히 형태가 찢어진 것이 아니라, 이 전체 시스템이 동시에 무너졌을 가능성이 컸다. 과연 이토록 파괴된 조직에서 다시 정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 세포가 남아 있을까 싶었다.

 

필자는 고환에서 모래를 빼내고 면밀하게 추적하기 시작했다. 정자를 생성하는 정세관을 따라가며 남아 있는 구조를 낱낱히 확인해보니, 다행히 형태가 유지된 일부 정세관 안에서 세포가 확인되었고, 그 안에서 정자 혹은 그 전 단계의 세포를 조심스럽게 분리해 낼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이미 무너진 조직이었지만, 그 안에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생명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하다. 고환 조직에 혈류가 끊기면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조금만 지체해도 되돌릴 수 없는 상태로 넘어간다. 망가진 조직이 도착한 순간부터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가능한 구조를 선별하고, 살아 있는 세포를 분리해, 지체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고환에서 회수된 생식세포는 곧바로 동결보존에 들어갔다. 보호제를 사용해 세포 손상을 최소화하고, 극저온 상태에서 대사를 멈춘 채 시간을 묶어두었다. 이후 그 세포는 긴 시간 동안 그대로 보관되었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성인이 되었고 결혼을 했다. 예상대로 자연 임신은 어려운 상태였다. 그때 꺼내든 것이 과거 동결보존을 해 놓은 정자였다. 해동된 정자는 충분한 운동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여서 정자를 난자 안으로 직접 주입하는 방식의 미세수정(세포질내 정자주입술/ICSI)으로 배아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임신(출산)을 할 수 있었다.

 

이 사례는 기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한 사람의 판단이었다. 손상된 조직에서 생식세포를 끝까지 추적해 볼 것인가, 아니면 이미 파괴된 고환을 두고 되돌릴 수 없는 결과로 받아들일 것인가. 그 선택은 길지 않았고, 물러설 여지도 없었다.

 

생식은 기다린다고 회복되는 기능이 아니다. 한 번 무너진 시간은 다시 쌓이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남는 것은 단 하나, 그 순간의 판단이다. 그 판단이 시간을 붙잡고, 그 시간을 건너 생명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