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하얼빈(哈爾濱)역 플랫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직함을 가진 사내가 품속에서 권총을 뽑는다. 잠시 후 몇 발의 총성이 들리더니 일본 정치 거물 이토 히로부미가 플랫폼 바닥에 쓰러진다. 총을 쏜 사내는 안중군 의사다.
안중근은 행동을 무겁게 하라는 뜻에서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자(字)이고 원래의 이름은 태어날 때 가슴과 배에 일곱 개의 점이 마치 북두칠성과 비슷하다 하여 안응칠이다. 김옥균의 개화사상에 궤를 같이한 관계로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으로 인해 황해도 오지로 숨어든다. 그의 가문을 따진다면 성리학의 태산북두인 문성공 26대손이다. 이토 히로부미로 익숙한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일본 원로 정치인이며 내각 총리를 네 번씩이나 역임했던 거물이다. 출신이 박약한 하급 병족의 자식이지만 귀족의 양자로 입적되어 영국과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온 후 일본의 근대화 개혁인 ‘명치유신’때 권력을 잡은 국제 정세에 상당한 안목을 가진 인물이다.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중국 건국의 어머니라 불리는 덩샤오핑은 그의 아들과의 대화에서 이등박문을 상당히 똑똑한 수재라고 했다. 훗날 그는 온갖 수단으로 권력을 잡아 천황의 신임을 얻어 조선합병의 의견을 냈고 그 의견이 받아들여져 천황특파 전권대사로 조선에 들어와 고종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다.
정치 거물 이등박문을 쏜 안중근의사는 테러리스트로 전 세계에 보도됐으나 정작 본인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논어에 나오는 성현의 말씀을 따랐을 뿐이다.” 라며 하소연 할 길이 없는 그는 몸으로 항변했다. 그 증거로 열악한 감옥에서 붓을 들어 두 폭의 대련을 쓴다. 붓글씨 자체로만 보면 썩 잘 쓴 글씨는 아니다. 오히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은 당대 명필이다. 논어 학이 편 학이시습에 대한 해석인 일일부독서 구 중생 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과 견리사의 견위수명이 그것이다. 견리사의(見利思義)면 견위수명(見危授命)이란 “이득을 보면 옳은가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목숨을 주어라”라는 뜻이다.
안중근의사가 쓴 견위수명 붓글씨는 단순 테러가 아니라 성현의 말씀대로 나라가 위태롭기 때문에 이등박문을 향해 총을 겨눴다는 무언의 항변이다. 10월 26일은 안중근의사의 의거 날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