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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순 한국미술관 관장은 지난 2007년 용인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던 날을 기억한다.
“시게코는 백남준이 생전에 입었었고, 사후 입관시에도 입고 있던 푸른 두루마기와 똑같은 옷을 입고 시장실에 나타났어요. 저는 두 사람이 똑같이 옷을 해 입었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시게코는 너무도 태연하게 백남준 옷이라며 이렇게 기쁜날 남준과 함께 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녀와 백남준은 영원히 함께 해요.”
한때 시게코 흉을 봤다는 김윤순 관장. 80년대 처음 뉴욕 소호에 있는 그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 깜짝 놀랐단다. 발 딛을 틈 없을 정도로 너무 지저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서야 그들의 삶이 이해가 간단다. 자유분방함이 있었기에 예술이 태어날 수 있었음을. 그렇지만 그들은 그같은 무질서 속에서도 뭐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질서를 간직하고 있었다고.
그들의 인생이 자유로왔듯 그들의 예술은 대중과의 소통,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면서 느낄 수 있는 열림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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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 발간된 ‘나의 사랑, 백남준’(구보다 시게코·남정호 지음)에서 남정호씨는 구보다 시게코는 결코 “백남준에 눌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불행한 비디오 작가”가 아니었음을 이야기 한다.
2009년, 당대 최고의 현대미술관인 모마(뉴욕 맨허튼 53번가)에서 현대미술 40년전을 할 때 시게코의 작품이 맨 앞에 있던 것은 물론 같은 시기, 구겐하임에서 백남준과 시게코의 작품을 똑같이 두점씩 전시한 점, 그리고 작가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써,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수가 백남준 14점, 시게코 14점으로 같다는 사실을 들 고 있다.
결국 유명한 백남준에 가려 빛을 못 본 예술가가 아니라 자기 나름의 영역을 구축하며 정상의 자리에 오른 성공한 예술가라는 점이다.
즉 백남준의 아내 시게코로서만이 아니라 예술적 동반자로서의 작가 시게코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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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남준 아트센터 개관식장에 정식으로 초청장조차 받지 못했다. 결국 참석을 포기하고 만 불운의 시게코.
그녀는 한편의 기고문에서 그날의 서운함을 토로한다.
“개관식을 일주일정도 앞두고 아트센터의 한 직원으로부터 전화와 팩스를 받았다. 그녀는 곧 다가올 개관식의 VIP 리스트에 이름을 실수로 빼뜨린 것에 사과하면서 참석 여부를 물었다. 그들로부터 받은 유일한 연락이었다. 아트센터 디렉터로부터 어떤 인사나 초대장도 받지 못했다.”
백남준과 한몸으로 지냈던 그녀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 주변의 작가들로부터 아직 초청장을 받지 못했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참담한 심정이 이해가 간다. 아트센터 개관을 누구보다 기뻐하고 손꼽아 기다렸지만 개관식에 참석하지 못한 그녀의 아픈 영혼.
“백남준은 한국을 세계의 백남준 센터로 만들기 위해 세계 각지의 유치전을 거부하고 한국, 그것도 용인으로 정했어요.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드나들고, 뭔가 북적북적 작업이 진행되는 모습을 백남준은 상상했을 거에요.”
시게코는 독일 뒤셀도르프를 방문했을 때 도시를 관통하면서 달리는 열차의 한쪽 면에서 백남준의 사인과 그가 인용한 “When too perfect”란 말과 함께 있는 커다란 그의 초상화를 봤다. 뉴욕 구겐하임과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뮤지엄, 파리의 퐁피두센터 등 백남준 전시가 곳곳에서 열리면서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 같고, 그의 예술작업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 모두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인상을 받고 있는 시게코.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미망인 시게코를 주목해야 한다.
또한 백남준과 40여년을 함께 했던 구보다 시게코의 세계적인 인맥을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개관 후 한번도 아트센터를 방문할 수 없던 시게코의 응어리를 풀어내야 한다.
그래서 백남준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구보다 시게코에게서 흘러 나올 백남준 예술의 진면목을 아트센터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2011년, 우리 도시를 관통하는 차량들에 붙은 백남준과 시게코의 커다란 초상화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