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누군가 내 얼굴을 다른 사람의 신체에 합성한 성적 영상물을 만들어 가지고 있다. 아직 인터넷에 올라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피해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일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영상이 실제로 유포됐다는 증거가 없더라도, 자신의 딥페이크 영상이 존재하고 언제든 세상에 퍼질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면 그 자체로 배상해야 할 정신적 손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를 바라보는 법원의 시선이 ‘얼마나 퍼졌느냐’에서 ‘피해자가 어떤 공포를 겪었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서울동부지법은 지난 7월 8일 딥페이크 영상 피해자 A 씨가 영상 제작자 B 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B 씨에게 12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사건은 20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B 씨는 텔레그램에서 작동하는 인공지능(AI) 봇을 이용해 A 씨의 얼굴을 다른 여성의 신체와 합성한 허위 영상물을 모두 8차례 만들었다. 만들어진 영상은 B 씨의 외장하드에 저장돼 있었다.
B 씨는 이 범행 등으로 형사재판에 넘겨져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허위 영상물 편집 등의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고 징역 5년이 확정됐다.
형사처벌과 별개로 A 씨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핵심은 실제 유포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딥페이크 영상에 대해서도 정신적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느냐였다.
법원은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B 씨가 영상을 외부에 전시하거나 실제로 유포했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유포를 목적으로 딥페이크 영상을 제작해 보관한 행위만으로도 피해자가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법원이 주목한 것은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갔는지가 아니었다. 피해자가 자신의 얼굴이 합성된 성적 영상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것이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온라인 공간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살아왔다는 점이었다.
한 번 인터넷에 공개된 디지털 성범죄 영상은 복제와 재유포를 완전히 막기 어렵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아직 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안전을 의미하지 않는 셈이다.
재판부는 딥페이크 영상의 제작 경위와 횟수, 범행의 중대성, 피해자가 받은 정신적 충격 등을 종합해 위자료를 1200만 원으로 정했다.
같은 가해자를 상대로 한 또 다른 민사소송에서도 비슷한 판단이 이미 나온 바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5월 28일 피해자 C 씨가 B 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800만 원의 위자료를 인정했다. 이 사건에서도 법원은 딥페이크 영상으로 피해자가 입은 정신적 고통을 손해배상의 중요한 판단 요소로 삼았다.
두 판결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의 범위를 바라보는 기준 때문이다.
그동안 불법 촬영물이나 성적 영상물 사건에서는 실제 게시 여부와 유포 범위, 피해 영상의 확산 정도 등이 피해 규모를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로 다뤄졌다. 하지만 딥페이크는 실제 촬영조차 없이 피해자의 얼굴 사진 몇 장만으로 성적 영상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더구나 제작된 파일이 가해자의 휴대전화나 컴퓨터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는 ‘언젠가 인터넷에 올라올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번 판결들은 바로 그 ‘유포되기 전의 공포’도 법적으로 배상받아야 할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특히 AI 기술의 발달로 얼굴 합성과 영상 제작의 문턱이 빠르게 낮아지는 상황에서 이번 판단은 향후 딥페이크 피해자들의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영상이 실제 퍼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피해가 가볍게 평가돼서는 안 된다는 사법적 판단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 사건을 다수 대리해 온 채다은 법무법인 한중 변호사는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만으로 이 정도 금액이 인정됐다는 것은 적지 않은 수준”이라며 “온라인 성범죄 피해의 심각성을 법원이 상당 부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딥페이크 범죄에 대한 사법적 판단 기준이 형성되는 단계인 만큼 앞으로 피해 정도와 범행 형태에 따라 위자료 인정 범위가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딥페이크 범죄에서 버튼 한 번으로 만들어진 가짜 영상은 실제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더라도 피해자의 일상을 이미 바꿔놓을 수 있다.
이번 판결이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딥페이크 피해는 영상이 퍼지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이용한 성적 영상물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