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평생 모아 마련한 집 한 채. 예전 은퇴세대에게 이 집은 자녀에게 물려줄 마지막 재산에 가까웠다. 그런데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집값은 수억원에 달하지만 정작 매달 쓸 생활비가 부족한 고령층이 집을 그대로 보유한 채 매달 현금을 받는 주택연금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집을 지키면서 생활비를 만든다’는 선택이다. 특히 올해 들어 월 지급액까지 올라가면서 주택연금 가입자는 빠르게 늘고 있다.
한국주택금융공사는 지난 3월 1일부터 신규 가입자의 주택연금 월 지급액을 평균 3.13% 인상했다. 이후 가입자 움직임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올해 신규 가입자는 1월 939명, 2월 780명이었지만 지급액 인상이 적용된 3월 1287명으로 뛰었다. 4월에는 2322명이 가입하며 월간 기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5월에도 1648명이 새로 가입해 연초보다 높은 수준을 이어갔다.
주택연금으로 실제 풀리는 돈도 커지고 있다. 최근 한 달 주택연금 지급 규모는 2756억원으로 1년 전 2278억원보다 21% 이상 증가했다. 전체 연금 보증잔액도 159조7134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 144조9492억원보다 10.1% 늘었다.
은퇴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매달 들어오는 현금이다.
주택연금 평균 가입 연령인 72세가 시세 4억 원짜리 일반주택을 담보로 종신 정액형에 가입할 경우 월 지급액은 약 133만 8000원이다. 3월 이전 129만 7000원보다 월 4만 1000원 늘었다. 1년이면 약 49만 원 차이다.
집값이 10억 원이라면 규모는 훨씬 커진다. 같은 72세가 10억 원짜리 일반주택으로 종신 정액형에 가입하면 매달 334만 5370원을 받을 수 있다. 이전보다 월 10만 원가량 많다. 웬만한 직장인의 월급과 맞먹는 돈이 집 한 채에서 매달 나오는 셈이다.
다만 ‘10억 원 집이면 누구나 월 334만 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급액은 가입자의 나이와 주택가격에 따라 달라진다. 부부가 함께 가입하면 나이가 어린 배우자를 기준으로 산정한다. 남편이 75세, 아내가 65세라면 65세를 기준으로 계산한다. 연금을 지급해야 할 예상 기간이 길수록 월 지급액은 줄어드는 구조다.
주택가격을 계산하는 기준도 가입 자격을 판단할 때 사용하는 공시가격과 다르다. 아파트는 한국부동산원이나 KB국민은행 시세 등을 활용하고, 적절한 시세가 없으면 감정평가액을 적용한다.
눈여겨볼 대목은 주택연금이 반드시 ‘1주택자만의 제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공적 주택연금은 부부 중 한 명이 만 55세 이상이면서 부부가 가진 주택의 공시가격 합계가 12억 원 이하면 가입할 수 있다. 집이 두 채 이상이어도 공시가격 합계가 기준을 넘지 않으면 가능하다.
2주택자의 공시가격 합계가 12억 원을 초과하더라도 일정한 경우 가입 후 3년 안에 한 채를 처분한다는 조건으로 가입할 수 있다. ‘다주택자이면 무조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물론 공짜 연금은 아니다.
주택연금은 이름은 ‘연금’이지만 금융 구조상으로는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매달 나눠 받는 장기 주택담보대출에 가깝다. 일반형의 경우 주택가격의 1.0%가 초기보증료로 붙고, 대출잔액에 대해서도 연 0.95%의 연보증료가 부과된다. 매달 받은 연금과 이자, 보증료가 시간이 지나면서 대출잔액으로 쌓인다.
그렇다고 자녀에게 빚이 그대로 넘어가는 구조는 아니다. 가입자와 배우자가 모두 사망하면 담보주택을 처분해 대출금을 정산한다. 집을 판 돈이 대출잔액보다 많으면 남은 금액은 상속인에게 돌아간다. 반대로 집값이 대출잔액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원칙적으로 그 부족분을 상속인에게 청구하지 않는다.
결국 주택연금 가입을 결정하는 가장 큰 기준은 ‘집을 얼마나 남길 것인가’와 ‘지금 얼마나 쓸 것인가’ 사이의 선택이다.
수령 방식도 노후 생활패턴에 따라 달라진다.
가장 일반적인 정액형은 가입 당시 정해진 금액을 평생 똑같이 받는다. 집값이 나중에 하락하더라도 월 지급액이 줄지 않아 생활비를 일정하게 관리하려는 은퇴자에게 적합하다.
은퇴 직후 돈이 더 많이 필요한 사람은 초기증액형을 선택할 수 있다. 3년·5년·7년·10년 가운데 기간을 정해 초기에 정액형보다 많은 돈을 받고, 이후 지급액이 초기 금액의 70% 수준으로 낮아지는 방식이다. 퇴직은 했지만 국민연금 수령까지 몇 년이 남은 경우처럼 ‘소득 공백’이 생길 때 활용할 수 있다.
반대로 오래 살수록 돈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정기증가형이 있다. 초반 지급액은 정액형보다 적지만 3년마다 4.5%씩 월 지급액이 늘어난다. 초기에는 국민연금이나 퇴직연금으로 생활이 가능하지만 고령기에 의료비와 간병비 부담이 커질 것에 대비하려는 가입자에게 맞는 방식이다.
공적 주택연금의 문턱을 넘는 고가주택 보유자를 겨냥한 민간 시장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시가격 12억 원을 초과하는 주택은 공적 주택연금 가입이 제한되기 때문에 서울 강남권 등 고가주택을 보유한 은퇴자에게는 오히려 ‘집은 비싼데 연금은 못 받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틈을 민간 주택연금이 파고들고 있다.
하나생명이 운영하고 하나은행이 판매를 중개하는 ‘하나더넥스트 내집연금’은 공시가격 12억 원을 초과하는 주택을 주요 대상으로 한다. 부부 가운데 나이가 어린 사람이 만 55세 이상이어야 하며 해당 주택을 2년 이상 보유하고 실제 거주해야 한다. 총 대출한도는 최대 15억 원이다.
예를 들어 시세 26억 원 수준의 서울 강남구 아파트를 보유한 65세 가입자라면 조건에 따라 월 460만 원 안팎을 받을 수 있다.
가입자가 먼저 사망해도 배우자가 채무를 승계해 계속 연금을 받을 수 있고, 부부 모두 사망한 뒤 주택 처분가격이 대출잔액보다 적더라도 부족액을 추가로 청구하지 않는 비소구 방식이 적용된다.
시장 반응도 과거와 달라졌다. 이 상품은 출시 1년여 만에 누적 가입금액이 3300억 원을 넘어섰고, 7월 중순 기준 가입자는 272명으로 늘었다. 2022~2024년 시중은행 전체의 민간 주택연금 취급 건수가 연간 네 건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확연한 변화다.
이 같은 주택연금 확산의 배경에는 한국 고령층이 가진 독특한 자산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수억 원짜리 아파트를 가지고 있어도 대부분의 자산이 집에 묶여 있으면 매달 쓸 수 있는 돈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자산은 많은데 현금은 없는’ 이른바 하우스 리치·캐시 푸어 문제다.
국민연금과 퇴직연금만으로 생활비와 관리비, 의료비를 모두 충당하기 어려운 고령층에게 주택은 이제 단순한 거주공간이나 상속재산이 아니라 노후소득을 만들어내는 자산으로 바뀌고 있다.
물론 주택연금이 모든 사람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다. 향후 집을 매각하거나 자녀에게 최대한 온전히 물려주려는 사람이라면 신중해야 한다. 이사나 재건축·재개발 가능성이 있는 주택이라면 담보주택 변경과 계약 유지 조건도 미리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집 한 채가 자산의 대부분이고 매달 쓸 노후소득이 부족하다면 계산법은 달라진다.
‘집을 얼마에 물려줄 것인가’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쓸 것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은퇴자가 늘어날수록 주택연금 시장은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수억원짜리 집을 보유하고도 통장 잔액을 걱정하던 고령층에게 집이 매달 월급을 주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