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굴린 사람과 방치한 사람의 격차…수익률 최대 39배"

  • 등록 2026.06.23 09: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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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조 쌓였지만 방치된 계좌들 수두룩 
DB형·DC형도 모르는 직장인 수백만 명
나도 몰래 노후 격차는 이미 시작됐다

 

용인신문 |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이 처음으로 500조 원을 넘어섰다. 언뜻 보면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노후 준비가 탄탄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숫자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현실이 나타난다. 진짜 문제는 퇴직연금 규모가 아니라 그 돈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느냐다.
많은 사람들은 퇴직연금을 단순히 "퇴직할 때 받는 돈" 정도로 생각한다. 회사가 알아서 관리해 주고 퇴직할 때 찾아가는 돈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다. 그러나 현실은 이미 달라졌다. 특히 확정기여형(DC)과 개인형퇴직연금(IRP)은 가입자가 직접 상품을 선택하고 운용해야 한다. 퇴직연금도 사실상 투자 계좌가 된 셈이다.
문제는 상당수 직장인이 이 사실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DB형인지 DC형인지 모르겠다."
"퇴직연금이 어디에 투자되는지 모르겠다."
"수익률을 한 번도 확인해 본 적이 없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실제로 많은 가입자들은 계좌가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어떤 상품에 투자되고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않는다.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에 달하는 노후 자산이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셈이다.
이번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보고서가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해 퇴직연금 수익률 상위 10% 가입자의 평균 수익률은 19.5%였다. 반면 하위 10% 가입자의 수익률은 0.5%에 불과했다. 무려 40배 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숫자를 보고 "투자를 잘한 사람과 못한 사람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은 조금 다르다. 상위권 가입자들은 실적배당형 상품 비중이 84%에 달했다. 반면 하위권 가입자들은 예금과 같은 원리금보장형 상품이나 현금성 자산 비중이 74%를 차지했다. 결국 수익률 격차의 상당 부분은 투자 능력보다 금융 지식과 관심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격차가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커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40세 직장인 두 사람이 각각 퇴직연금 계좌에 1억 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한 사람은 장기적으로 연평균 8~10% 수준의 수익률을 기록하는 투자 상품에 자금을 운용하고, 다른 사람은 연 2% 수준의 예금에만 돈을 넣어둔다면 20년 뒤 자산 규모는 수억 원 차이가 날 수 있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기간 일했고 같은 월급을 받았는데도 은퇴 시점의 자산 규모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사실 퇴직연금은 일반 주식계좌와 성격이 다르다. 내일 당장 써야 할 생활비가 아니다. 은퇴까지 10년, 20년, 30년 남은 장기 투자 자금이다. 그런데도 많은 가입자는 '원금 손실'이라는 단어만 보고 모든 돈을 예금에 넣어둔다. 하지만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이는 위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산의 실질 가치를 잃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최근 ETF와 생애주기펀드(TDF)가 퇴직연금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TF는 장기적으로 자본시장 성장의 혜택을 기대할 수 있고, TDF는 은퇴 시점에 맞춰 위험자산과 안전자산 비중을 자동으로 조정해 준다. 투자 경험이 부족한 직장인에게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평가받는다.
물론 모든 사람이 공격적으로 ETF에 투자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이와 투자 성향, 은퇴 시기에 따라 정답은 달라질 수 있다. 30대와 40대처럼 은퇴까지 20~30년 이상 남은 직장인이라면 일정 수준의 위험자산 비중을 가져가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지만, 은퇴를 앞둔 50대 후반이나 60대라면 안정성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
또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현재 퇴직연금 적립금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확정급여형(DB)에 묶여 있다. DB형은 회사가 운용 책임을 지기 때문에 직원이 ETF나 펀드를 직접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보고서에서 나타난 수익률 격차는 주로 DC형과 IRP 가입자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있다. 퇴직연금은 더 이상 회사가 퇴직할 때 챙겨주는 돈이 아니라는 점이다. 직장인이 직접 관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노후 자산 중 하나가 됐다.
퇴직연금 500조 시대. 이제 중요한 것은 적립금 규모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수많은 직장인이 자신의 퇴직연금이 어떻게 운용되는지조차 모른다는 점이다. 실제로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의 퇴직연금이 DB형인지 DC형인지, 수익률이 얼마인지, 어떤 상품에 투자되고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집을 살 때는 등기부등본을 확인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노후를 책임질 계좌는 수년 동안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기간 일해도 누군가는 수억 원의 자산을 더 만들고, 누군가는 물가상승률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결과를 맞을 수 있다.
결국 퇴직연금의 성패는 금융회사가 아니라 가입자 스스로의 관심에 달려 있다. 퇴직연금의 진짜 문제는 수익률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자기 계좌가 DB형인지 DC형인지조차 모르는 직장인이 수백만 명에 이르는 현실에서, 500조 원이라는 거대한 숫자는 든든한 노후의 상징이 아니라 방치된 노후의 경고등일 수도 있다.

이승주 기자 chosun30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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