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서정 박태진 구름이 층지고 물들며 트이는 하늘은 먼 황혼 노을에 수수 이삭이 또 녹슬은 철륜()이 순진스레 흙빛을 띠고 하는데 이제 폐허진 주택지는 앙상히 일년초와 더불어 바람을 싸늘히 안는 잠시 들리는 포성이 차거운 거리에 또 하루가 예감에 매인 채 그 멀다는 황혼에 잦아들고 여윈 볕이 따신 담벽마다 탄흔에 그늘지는 노스탈쟈 유리 깨진 창가에 가을이 온다 박태진(1921~2006)은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의 릿교대학 영문학부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1948년 연합신문에 「신개지」를 발표하면 문단에 나왔다. 그는 김수영, 박인환과 절친이었다. 「서울과 서정」은 전시인 1953년에 쓰여졌다. 서울은 폐허였으며 포성은 멀리서 들려왔다. 포성이 들려오는 차가운 거리에 황혼이 찾아들면 노스탈챠가 스며들고 유리 깨진 창가로 가을이 성큼다가 오는 것이다. 신구문화사『한국전후문제시집』1964, 중에서. 김윤배/시인
화상보 박재삼 참말이다. 춘향이 일편단심을 생각해 보아라. 원이라면 꿈속엔 훌륭한 꽃동산이 온전히 제 것이 되었을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꾸는 슬기 다음에는 마치 저 하늘의 달에나 비칠 것인가, 한결 같이 그 둘레를 거닐어 제자리 돌아오는 일이나 맘대로 하였을 그 것이다. 아니라면 그 많은 새벽 바다를 사람치고 그렇게 같은 때를 잠 깨일 수는 도무지 없는 일이란 말이다. 박재삼(1933~1997)은 일본 도쿄에서 막노동을 하던 아버지 박찬홍과 어머니 김어진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 때 어머니의 고향인 경남 삼천포로 귀국해서 성장했다. 1946년 박재삼은 삼천포여자중학교의 사환으로 들어간다. 그는 이때 삼천포여중의 교사로 있던 시조 시인 김상옥과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이 박재삼을 시의 세계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1953년 시조 「강(江)물에서」가 모윤숙의 추천으로 『문예』 11월호에 발표된다. 박재삼은 곧 김상옥의 천거로 잡지 창간을 준비하고 있던 ‘현대문학사’에 취직한다. 「화상보」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작품이다. 그리고 서정성이 짙은 시편이기도 하다. ‘참말이다’로 시작되는 산문시의 첫 행이 인상적이다. 꿈속의 꽃동산과 밤하늘의 달빛은 현실
다리 위에서 1 박양균 다시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앞에 두고 온갖 영위하는 자의 슬픈 포효를 지닌 채, 영겁을 눈짓하는 다리의 습성에서, (구태여 죄를 가시우기 위해서 만이 아니라) 나는 시간의 위촉에서 벗어나 무한을 향해 손을 들어본다. 박양균(1924~1990)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났다. 1952년 시 「창」으로 문단에 나왔다. 1990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문학부문을 수상했다. 「다리 위에서 1」은 다리가 지닌 심판의 두려움을 견디기 위해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무한을 향해 손을 흔들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시다. 신구문화사『한국전후문제시집』1964, 중에서. 김윤배/시인
꽃의 김광림 처음 인간에게 들킨 아름다움처럼 경외하는 눈. 눈은, 그만 꽃이었다 에초엔 빛깔 보다도 내음보다도 안. 속으로부터 참아 나오는 울음 소릴 지른 것이 분명했다 지구를 꽃으로 변용시킨 신의 의도가 좌절되기에 앞서- 수액을 보듬어 잉태하는 생성의 아픔. 아픈 개념이 꽃이었다 김광림은 1929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1948년 시 「문풍지」로 시단에 나왔다. 시전문잡지 『심상』의 편집동이이었다. 「꽃의」는 은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눈이 꽃이라는 것이다. 꽃이 울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생성의 아픈 개념이 꽃이라는 것이다. 『한국전후문제시집』 중에서. 김윤배/시인
구열 구자운 그건 어떤 깎고 닦은 돌 면상에 구열진 금이었다 어떤 것은 서로 엉글려서 설형으로 헐고 어떤 것은 아련히 흐름으로 계집의 나체를 그어놨다 그리고 어떤 것은 천천히 구을려 또 나체의 아랫도리를 풀이파리처럼 서성였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러한 구열진 금의 아스러움이 -그렇다 이건 우발인지 모르지만 내 늙어 앙상한 뼈다귀에도 서걱이어 때로 나로 하여금 허황한 꿈 속에서 황홀히 젖게 함이 아니런가? 고 구자운(1926~1972)은 일제강점기에 부산 중구 부용동에서 출생했다. 1955년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소아마비의 몸으로 평생 시를 쓰며 살았다. 순수서정으로 돌아가려는 시운동을 전개했다. 「구열」은 거북이 등의 균열을 시로 향상화한 작품이다. 돌면상에 그어진 금이었거나 어떤 것은 서로 엉클어진 쐐기 모양의 기둥으로 헐고 어떤 것은 계집의 나체모양을 그어놓았으며 어떤 것은 나체의 아랫도리를 풀이파리처럼 서성이고 있다. 나는 생각에 잠긴다. 이건 우발적이기는 하지만 내 늙어 앙상한 뼈다귀에도 서걱이어서 허황한 꿈속에 젖게 하는 것이다. 『한국전후문제시집』 중에서. 김윤배/시인
소설과 철학의 기원 송경동 광화문 촛불 집회 때 백만이 넘어가자 유명한 철학자 한 분께서 무대에 서겠다고 자꾸 마이크를 달라 했다 가르쳐주고 싶은 게 많은가보았다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가 거대해졌을 땐 한 저명한 소설가께서 허둥지둥 현장을 휘젓다가 방송 카메라가 보이자 저돌적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가보았다 그뒤로 나는 그 철학자와 소설가의 책은 안 본다 굳이 그 깊이와 복선을 읽지 않아도 될 그들의 진면목을 보았기 때문이다 송경동은 1967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다. 2001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그는 현실문제에 목소리를 내온 투사형 시인이다. 「소설과 철학의 기원」은 시위현장에서 있었던 일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현장 시다. 이중인격적인 행태를 보이는 철학자와 소설가를 모티브로 삼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철학자와 소설가인 셈이다. <창비> 간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중에서. 김윤배/시인
적막 신철규 모내기가 끝난 논 이양기 지나간 자리에 남은 앙다문 이빨자국 두 다리가 삐죽 나온 올챙이 창자를 달고 우주인처럼 둥둥 떠 있다 일찍 태어난 게 죄다 바람이 건 듯 불자 최르르 밀려 논두렁에 부딪히는 물낯 하늘 속을 유영하는 구름 위에 거꾸로 매달린 소금쟁이 어지러운 듯 손톱으로 꽉, 부여잡고 있다 신철규는 1980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가 있다. 「적막」은 죽음의 노래다. 모내기를 끝낸 논에서 올챙이의 죽음을 본 것이다. 올챙이는 두 다리를 삐죽 내밀고 창자를 매단 채 둥둥 떠 있는 것이다. 일찍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양기가 지나갈 때 깔려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일찍 태어난 게 죄인 것이다. 풍경은 더 있다. 논물에 하늘이 잠기고 구름이 떠 있다. 소금쟁이가 거꾸로 매달려 어지러운 듯 구름을 손톱으로 꽉 부여잡고 있는 것이다. <창비> 간 『심장보다 높이』 중에서. 김윤배/시인
죄책감 최지인 너와 손잡고 누워 있을 때/ 나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 세계의 끝은 어디일까/ 수면 위로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빛바랜 벽지를 뜯어내면/ 더 빛바랜 벽지가 있었다// 선미에서 네가 사라질까봐/ 두 손을 크게 흔들었다// 컹컹 짖는 개를/ 잠들 때까지 쓰다듬고// 종이 상자에서/ 곰팡이 핀 귤을 골라내며//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기도했었다// 고요했다/ 태풍이 온다는데//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최지인은 1990년 경기도 광명에서 태어났다.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 『나는 벽에 붙어 잤다』가 있다. 「죄책감」은 너와 손잡고 있는 것이 죄책감이고 이 세계의 끝을 생각하는 게 죄책감이고 오래된 벽지가 죄책감이고 선미에 선 너를 보는 게 죄책감이고 개를 쓰다듬는 게 죄책감이고 곰팡이가 핀 귤을 골라내는 게 죄책감이고 나를 내가 미워하지 않는 게 죄책감이고 기도 하는 게 죄책감이고 고요한 게 죄책감이다. <창비> 간 『일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중에서. 김윤배/시인
느끼고 힘을 준다는 것 김유림 산삼을 닮은 당근 조형물을 보고 있었지. 눈이 멀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당근 조형물이 로터리에 있다는 걸 늘 확인하고 싶다. 버스는 엄청 빨리 달렸고 집에 도착하니 8시였다. 김유림은 199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6년 『현대시학』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그녀의 이번 시집의 특징은 자신의 이름을 시 속에 수없이 넣었다는 것이다. 상상력은 발랄하고 독창적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시를 읽는 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요즘 젋은 시인들의 난삽함이 없다. <창비> 간 『별세계』 중에서. 김윤배/시인
능금 박성룡 가을을, 듣고 있었다 지금 저기 저렇게 살벌한 나뭇가지에 익어 있는 (마치 –어디론가 멀리 기울어만 가는 태양의 마지막 수확처럼 가지 끝에 익어 있는) 저 향 짙은 체중에 귀를 기울이고 뵈는 것보다도 더 많은 가을을 듣고 있었다 ....맨 처음엔 몹시도 가까운 거리에서 마구 설레는 일진의 바람소리가 들려오고 다음엔 그 바람소리가 쓸리는 대로 흩어지는 무수한 나뭇잎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마지막에 하나의 크낙한 종이 내는 음향과 같은 해맑은 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왔다 박성룡(1934~2002)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55년 시 「화병정경」으로 문단에 나왔다. 「능금」은 능금이 익어가는 가을의 풍경을 노래한 시편이다. 능금은 기울어만 가는 태양의 마지막 수확처럼 가지 끝에 익어가는 중이고 화자는 향내를 맡으며 가을을 듣고 있다. 바람소리가 들리고 흩어지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오고 커다란 종소리가 들려온다. 『한국전후문제시집』 중에서. 김윤배/시인
실바람 김윤성 겉으로 평온하고 순간으로 무사한 이 조용한 봄날 아침 천사들은 아직 명상에만 잠겨 있을 때 이유와 더불어 한 오리 실바람이 불어 온다 흩어졌다 다시 모여드는 새의 무리처럼 쾌감의 저쪽에서 되돌아오듯 숨을 길을 따라 원래의 얼굴 그대로- 오직 한 사람만이 눈을 뜨게 된다면 네가 바로 그 한 사람이 되리라 김윤성(1926~2017)은 서울에서 출생했다. 광복 직후 정한모 구경서 등과 동인지 ‘백맥’을 창간하여 해방문단에서 활동 했다. 계성보통학교 6년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독학으로 시 공부를 했다. 「실바람」은 봄날 아침의 요요로운 정적을 타고 불어오는 실바람을 노래한 시다. 그러나 실바람은 격정적인 이미지를 거느리며 죽음과 삶을 깊이 있게 바라본다. ‘눈을 떠라 죽음을 지닌 생명의 빛, 집요한 준엄이여!’라고 봄의 생명과 죽음을 응시하는 것이다. 그 때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게 된다면 네가 그 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외친다. 『한국전후문제시집』 중에서. 김윤배/시인
설화雪花 김남조 여긴 외로운 인습의 사막인데 그나마 별빛을 피해 나무그늘에 울던 애상의 마을인데 불 켜지듯 환히 눈도 부셔라 눈이여 신의 지문이나 찍혔을까 도무지 무구한 백자의 살결에 수정의 차가움만이 상기도 겹겹이 적시며 있으려니 이러한 날에 솔바람 이우는 산곡 얼어붙은 옹달샘을 찾아가면 거기서 잃어버린 이의 얼굴이 비쳐나 있을까 서성대며 머뭇거리는 고독한 영혼 (.....) 아아 눈뿌리 타는 더운 눈물을 뿌리면 설화는 거두어 하늘에 다시 피리라 김남조 시인은 1927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올해 나이 95세다.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숙」「잔상」을 발표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설화」는 눈 온 아침의 풍경을 노래한 연시다. 인습의 사막에 내린 흰 눈, 애상의 마을에 내린 흰 눈은 눈부시다. 저 희고 순결한 눈 위에 신의 지문이 찍혔을지, 수정의 차가움이 겹겹이 백자 같은 살결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산곡 얼어붙은 옹달샘을 찾아가면 거기에 잃어버린 이의 얼굴을 만날지 몰라 서성이는 화자는 고독한 영혼이다. 『한국전후문제시집』 중에서.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