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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시인의 감동이 있는 시

이별은 선한 의식이다ㅣ허연

이별은 선한 의식이다

                                                           허연

 

죽었다 살았다 하는 깜박이는 보안등 아래서 얼굴 반쪽이 있다가 없기를 반복한다. 이별처럼 선한 의식이 있다니. 나는 오늘 감사하다. 너를 영원히 알 수 없었으니 또 감사하다. 소음처럼 지겨운 직박구리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사랑은 식어간다. 무엇인가를 위해서 울지는 않았다. 오직 남겨질 나를 생각하고

내가 식어가기를 기다렸다. 보안등 아래서. 몇 개의 맹세와 몇 개의 수식과 복잡함 네거리를 통째로 식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주문처럼 흔들렸다.

 

식었으니 편안하다.

 

허연은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신문사 기자인 그가 부단히 전위를 탐하며 실험과 부정을 멈추지 않을 때 그는 새뮤얼 베케트의 표정을 가지며 집요하게 고전과 이상의 활자에 몰입하며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언어의 무의식을 해독해내고자 할 때 그는 보르헤스나 제임스 조이스의 표정을 갖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별은 선한 의식이다」는 연인과 헤어지는 장면의 담담함과 냉냉함을 노래하고 있다. 그걸 선한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별의 장소에 나가면서 온갖 상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이별은 쿨 했던 것이다. 원망도 눈물도 애원도 미련도 없는 산뜻한 이별은 요즘 젊은이들의 이별법이다. 한국인의 정서 속의 이별은 김소월이나 한용운의 시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당신은 갔지만 내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다’라는 것이다.

의식은 언제나 무겁고 격조가 있는 법인데 시적화자가 맞고 있는 이별의식은 너무 선해서 놀랍다는 거고 그게 감사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별을 제안 한 것은 남자 아닐까 싶다. 그렇게 선하게 이별을 받아주는 것으로 보아 여자도 이별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다. 여자가 이별을 제안했을 수도 있다. ‘오직 남겨질 나를 생각하고/내가 식어가기를 기다렸다.’라는 구절이 그렇다.

그동안의 맹세를 식히고 수많은 수식을 식히고 복잡한 네거리를 식히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주문처럼 흔들’리는 이별인 것이다. 이 시대의 이별법의 완성이다. <문학과지성사> 간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중에서.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