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44세 나이에 곤장을 맞는 장형 80대에 처해진 뒤 평안도 희천(熙川)땅에 유배(실록연산4년 1498년 7월19일)되었다가 갑자사화로 유배지에서 참수당한 후 죽은 몸, 즉 시체인 상태로 순천의 저자거리인 철물시(鐵物市)로 이거(移居)된 후 다시 사지가 찢겨 효수된 인물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이다<실록연산10년 1504년 10월 7일>. (김굉필은 아호가 없으며 한원당은 그가 공부하던 처가 옆에 지은 글방의 당호다.)
그야말로 멸문지화 정도가 아니라 집안이 멸절된 것이다. 그런데 106년 후 멸문의 극형을 당하고도 스승 김종직도 성취하지 못한 반전을 했는데 1610년 광해2년 9월 4일에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과 함께 이조오현(五賢)으로 수현 되면서 동방18현으로 동배향 제3위 문경공(文敬公)으로 문묘에 종사된 것이다. 세조8년 1462년 무과로 등과한 무인 김유는 쌍둥이 김굉필 형제를 포함 13명의 자녀를 뒀으나 모두 어려서 단명(?)하고 김굉필만 독자로 자란 탓에 천지분간 못하는 안하무인격이다. 그를 잡아준 인물이 21세 때 만난 스승 김종직이다.
스승의 소학 책 가르침은 매섭기가 치를 떨었다한다. 지독한 공부 끝에 만 6년이 지난 27세에 이르러 등과한다. 그리고 5년 후 성종 17년, 1486년 32세 때 스승 김종직은 이조참판의 벼슬이지만 임금께 할 말을 못한다는 평판이 저자거리 유생에게 까지 퍼졌다. 견디다 못한 제자 김굉필은 스승에게 칠언절구의 시를 보낸다. “날 맑으면 나가고 비올 땐 들어앉는 거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이 눈치 저 눈치 보시면서 아무 일도 안하시면서 왜 그런 높은 자리는 꿰차고 있는 겁니까.” 독설도 이런 독설이 또 있으랴. 이에 스승 이조참판 김종직이 칠언절구의 답시를 보낸다. “그러게나 말일세. 능력도 안 되는 것이 높은 자리 꿰차 제자에게까지 이런 수모를 받는걸 보면 왜 벼슬을 하는지도 모르겠구려.” 시로 주고받은 글이라 꽤 젊잖게 보이지만 이 시 속엔 사제지간에 돌이킬 수 없는 유감이 묻어난다. 둘은 끝내 죽어서도 얼굴 마주하는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법무부 장관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항간의 소문을 남긴 채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임기를 마치고 본업인 서울대 교수로 돌아갔다 한다. 김굉필 같은 제자를 뒀다면 그도 꽤나 피곤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