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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특집

이우현이 가다!
중앙아시아 항일운동가와
카레예츠를 찾아서


항일 독립투쟁 선봉장 '홍범도 장군' 잠들다

 

용인신문은 ‘3.1운동 ·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항일운동가인 홍범도 장군이 잠들어있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와 우즈베키스탄에 생존중인 고려인 1세대들을 취재해 보도하기로 했다. 이번 기획은 지난 21일부터 29일까지 중앙아시아 전문가이자 더불어민주당 내 ‘3·1운동 ·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특위집행위원을 맡은 이우현(용인병) 지역위원장과 공동으로 추진한 동행 취재 연재물이다. 어려운 여건과 촉박한 일정에도 동행 취재에 적극 협조해준 이 위원장과 현지 안내와 통역을 맡아준 키르기스스탄의 졸도쉬와 마흐무트, 그리고 우즈벡키스탄 국립체대 백문종 교수, 타슈켄트 세종학당 허선행 학당장, 타슈켄트 아리랑 요양원 김나영 원장, 민족지도자 황만금 선생의 둘째아들 황스타니슬라브씨 등 수많은 고려인들과 교민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편집자 주>

 

카자흐스탄의 홍범도 장군묘역을 찾아

아리랑 요양원고려인 1세대를 만나다

고려인 민족지도자 황만금폴리따제

고려인 노동영웅 북극성지도자 김병화

 

설 명절을 하루 앞둔 지난 24일 오전 9,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의 중앙공원묘지. 찬바람이 부는 허허벌판과 영도 이하의 체감 온도가 묘역 일대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인 알마티를 출발, 무려 1200Km가 넘는 곳을 자동차로 하루 반나절 만에 도착했다. 취재 일정상 알마티~크질오르다 항공편 대신 자동차 일정을 택했다. 끝이 없어 보이는 텐샨산맥을 따라 간간히 설산과 비포장의 협곡까지 관통하는 고된 여정이었다.


인천공항을 출발, 알마티 공항에 내리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국경을 넘어 키르기스스탄에 도착했다. 홍범도 장군 묘역이 있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를 가기 위해 잡은 최단의 경유코스였다. 우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군인들밖에 없는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이 위원장과 기자는 차에서 내려 직접 캐리어를 끌고, 간단한 여권 검사와 수속 절차를 밟았다. 먼저 국경을 통과하는 이 위원장 뒷모습을 보니 그가 짊어진 가방에 꽃인 태극기와 한반도기가 어둠 속에서도 유독 돋보였다. 중앙아시아 첫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항일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던 홍범도 장군(1868.8.27.~1943.10.25). 구한말의 의병대장이자 대한독립군 사령관, 대한독립군단의 부총재였던 그는 왜 이곳에 묻혀 있을까. 이 위원장은 묘지로 오기 하루 전 참배 때 쓸 제수 음식을 간단히 준비했다. 현지 과일 상점에 들려 과일과 약주(현지 맥주)를 준비했다. 전날 밤, 자정이 다되어 체크인한 크질오르다 호텔에서는 자동차로 불과 20여분 거리다. 큰길가 옆 출입문 현판엔 통일문이라고 한글로 쓰여 있었다. 옆으로 길이 나 있었고, 20여 미터 앞 정면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세워져 있었다. 이 위원장과 기자는 먹먹하게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바라보다가 간단히 제사상을 차린 후 참배를 했다. 주변의 묘비들은 풀밭 속에 세워져 있어 더욱 황량해 보였다. 참배 후 우리는 홍범도 거리를 거닐며,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항일무장투쟁의 대명사 여천 홍범도 장군

 

홍범도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나 1943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시에서 영면했다. 그는 구한말의 의병대장 중 한사람이자 일제강점기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대한독립군의 사령관이다. 북로군정서 사령관 백야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 대첩(1920.10.21.~10.26)을 거두었다.



홍범도는 항일무장투쟁의 대명사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치열한 대한독립의 길을 걸었다.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부터 머슴살이를 해야 했던 홍범도는 제지공장 노동자, 3년여의 승려생활을 거쳐 삼수갑산 일대에서 포수로 생계를 이어갔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홍범도는 포수생활을 접고 동료 포수들을 규합하여 1896년 의암 유인석 선생의 의병에 합류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의병활동에 뛰어 들었다.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고, 의병대장은 당연히 양반계급이 맡았다. 경상도 북부에서 거병하여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항일의병활동을 벌인 신돌석(1878.8.~1908.12.)과 홍범도는 평민출신의 의병대장으로 특이한 존재였다. 신돌석과 홍범도의 공통점은 가장 치열한 투쟁을 벌였으며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홍범도의 1차 의병활동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다음해에 강원도 철령에서 봉기하여 유인석 선생의 의병대에 합류하는 것으로 본격화 되었다. 홍범도는 유인석 선생의 권유로 독립하여 소수정예 포수중심의 유격전을 벌였다.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지역을 주요활동 거점으로 삼은 홍범도 의병대는 수십 차례의 대소전투에서 신출귀몰하는 기동력으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홍범도의 2차 의병활동은 1907731일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부터다. 홍범도 의병대는 유일하게 규모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잘 훈련된 전투력을 갖춘 정예부대였다. 일본군은 홍범도를 체포하기 위해 대규모 토벌대를 보냈으나 번번이 패퇴하였다. 일본군이 홍범도 부대의 주둔지를 알면서도 토벌할 수 없었던 것은 험준한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접근하는 토벌대를 장거리에서 저격하는 방법으로 격퇴시키는 전술에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의병대가 10여개 월의 활동을 넘기지 못하고 속속 토벌되었고 신돌석 마저 암살되어 의병의 맥이 끊기는 상황에서도 홍범도 의병대는 홀로 고군분투했다.


일본군은 홍범도를 잡기위해 부인 이옥구 여사를 회유했으나 실패하였다.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옥구 여사는 투항을 권유하는 서신에 서명하지 않았다. 1908년 이옥구 여사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아버지를 도와 의병활동을 하던 장남 홍양순도 1908528일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홍범도는 장남의 전사와 바맥이 전투의 결과를 일지에 남겼다. 1908년 홍범도 의병대는 삼수성을 함락시키고 갑산성, 북청 등 국경지대를 해방하고 함흥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1908년은 홍범도 의병대의 최전성기였고 부대원이 28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1909년 탄약이 떨어진 홍범도 의병대는 급격하게투쟁력을 상실하였다. 홍범도는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홍범도는 의병대를 해산하여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홍범도는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한 40여명의 휘하 지휘관들에게 산개하여 만주로 갈 것을 명했다. 홍범도는 당시 12세의 차남 홍용환과 부하 1명만 대동한 채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만주와 연해주를 오가며 항일무장투쟁 독립군을 양성한 홍범도는 192064~5, 길림성 화룡현 삼둔자에서 일본군 1개 중대를 선제공격하여 격파했다. 이어 66~7일 반격해온 일본군 500여 명을 봉오동에서 요격하여 150여명을 사살하고 300여명을 전투불능 상태의 치명적인 부상을 입혀 궤멸시켰다. 삼둔자-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는 단 4명만 전사했고, 2명이 부상당하였다. 일본 정규군을 선제공격하여 승리한 삼둔자-봉오동 전투를 계기로 만주일대의 독립운동세력은 직접적인 무장투쟁을 제1의 항일투쟁노선으로 삼게 되었다. 19201021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편성된 2개 사단의 일본군이 공격해오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를 주축으로 3000여 명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맞서 전투를 벌였다.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은 2000~3000명이 사살되었고 토벌부대 수백 명이 부상당하여 퇴각, 조선으로 철수해야 했다. 좀처럼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군의 기록에도 연대장 가토를 비롯한 9명의 지휘관과 1000여 명의 부사관 이하 사병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08년 홍범도 의병대 최고의 전성기

국경지대 해방·함흥 주둔 일본군 궤멸

스탈린 강제이주 정책에 불우한 말년


일본군은 조선주둔 19사단과 러시아 적백내전에 참전한 간섭군 1개 사단을 동원하여 1920105일부터 115일 까지 만주일대의 독립군 근거지를 초토화시키는 이른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확인된 조선 민간인 사망자 수만 3469명에 이르고 실제 살해된 조선인은 1만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청산리 전투는 이러한 과정에서 벌어진 피할 수 없는 전투였다. 조선으로 퇴각했던 일본군은 전력을 대폭 보강하여 5개 사단의 병력으로 재차 월경하여 독립군을 토끼몰이 하듯 토벌작전에 나섰다. 만주일대의 독립군은 단일한 지휘계통을 갖춘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하여 대응했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이 맡았고 부총재에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김규식을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지휘부를 구성했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흑룡강성 밀산현에서 겨울을 난 대한독립군단은 1921321일 산개하여 러시아령 연해주 이만으로 건너갔다. 근거지를 잃은 대한독립군단이 갈 곳은 러시아 밖에 없었다. 당시 러시아는 적백내전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일본 간섭군은 하바롭스크를 함락시켰다. 볼세비키 적군은 3500여 명의 대한독립군단을 일본 간섭군과 백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시키고 628일 무장해제를 명령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이 이를 거부하자 적군은 무차별 총격을 가해 1000여 명의 독립군이 살해되고 1000여 명은 필사적으로 탈주했다. 포로로 잡힌 일천수백여 명은 이르쿠츠크로 옮겨져 적군에 강제 편입되었다. 홍범도 역시 적군에 편입되어 독립대대장을 맡아야 했다.


홍범도는 1922121~22일 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아시아 9개국 인민대표자대회에 여운형 이동휘 김규식 등과 함께 한인 대표자의 일원으로 참석, 레닌과 트로츠키를 단독 면담하고 연해주로 돌아갔다. 연해주로 복귀한 홍범도는 적군대대에서 독립여단으로 격상된 한인부대를 지휘하여 일본 간섭군을 몰아냈다. 1923년 적군에서 전역한 홍범도는 연해주 한인농장의 지도자중 한사람으로 협동농장 일에 전념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트로츠키가 스탈린에 의해 국외로 추방된 1927, 홍범도는 소비에트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자의에 의한 입당인 지, 강요된 것인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1937년 스탈린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연해주 일대의 17만여 명의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한인과 일본인의 용모가 비슷하여 구분하기 어려운데다 한인이 일본에 협조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 홍범도는 카자흐스탄공화국 크질오르다 시에 정착하여 불우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그는 정미소노동자 극장경비를 비롯하여 일용직노동자 생활도 해야 했다. 19431026일 홍범도는 쓸쓸히 영면했다. 카자흐스탄 공산당 한인자치위원회 기관지인 레닌기치에 홍범도의 부고가 실렸고 상주는 크질오르다 정미소노동자 일동이었다. 홍범도는 28년여에 걸친 세월을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일관된 투쟁을 벌였다. 일제에 의해 온 가족을 잃고도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염원하던 홍범도는 낮선 중앙아시아 땅에서 고된 삶에서 벗어났다. 카자흐스탄공화국은 홍범도가 묻힌 크질오르다 공동묘지에 흉상을 세우고 홍범도 거리를 조성하여 그의 공적을 기렸다. 정부는 1963년 홍범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적장손인 이종찬 전 의원은 홍범도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켜 초대 이사장을 맡아 장군의 공적을 널리 알려왔다. 지난해 8월 민주당 우원식 의원이 홍범도기념사업회 2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우현 위원장은 묘소 참배 후 홍범도 거리까지 찬찬히 둘러본 후 크질으로다를 떠나면서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홍범도 장군의 유해송환은 물론 정부가 장군에게 최고 등급의 대한민국장을 추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장군을 비롯한 항일 무장투쟁의 혁혁한 공적을 남긴 독립운동가 들에게 새로운 기준으로 건국훈장을 추서하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행취재/ 용인신문 - 김종경 발행인 iyongin@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