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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문-안동


유림(儒林)의 고장 안동은 묘사가 아닌 설명이 필요하다

그곳엔 이황도, 이육사도, 이상룡도 있다. 그리고 봉정사도 있다

 



봉정사는 결이 고운 절이다. 정성을 다해 쌓은 천연(天然)의 멋 그대로인 돌담이 정겹다. 그 위로 당당히 서있는 만세루를 지나면 절제된 대웅전이 눈앞에 나타난다. 말간 느낌의 공포(栱包)와 앙증 맞은 마당, 유려한 배흘림기둥의 극락전(국보15)은 작지만 엄숙하다.


극락전은 기둥과 공포의 결구방식, 기둥과 기둥 사이에 가로지른 창방(昌枋) 위에 나무받침이 복화반(覆花盤, 꽃잎을 엎어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보이는 건축 양식을 계승한 현존 최고의 건물이다. 그러므로 안동은 봉정사로 인해 또 하나의 가치를 얻은 셈이다. 봉정사의 참나무 숲길이 오래도록 변함없기를, 정연한 건물들이 아담한 봉정사가 화려해지지 않게 해달라고 가지런히 합장했다.


더운 날의 강물은 존엄해 보인다. 물은 겨우겨우 느리게 흐르는 듯하다. 1500리 굽이치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도산서원 앞마당에 도착했다. 서원은 정문인 진도문과 중앙의 전교당을 기준으로 청량산을 품듯이 안겨있는 형세다.


퇴계 이황 선생은 1557년부터 서당을 설계했다. 서당은 맞배지붕의 홑처마 집이다. 1561년에 완성된 서당은 최소한의 조건만을 지녔다. 건축물로서의 한옥은 염결(廉潔)하다. 단순하되 누추하지 않았던 조선의 선비, 퇴계의 마음이 녹아있다.


퇴계는 2평에 불과한 작은방에서도 한양을 외면하지 않았다. 농운정사에 머물고 있던 제자들과는 침잠(沈潛)한 이론적 지성을 논하고, 마루에 앉아서는 낙동강을 타고 오는 세상의 소리를 들었다. 물가의 배움터에서도 정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한 퇴계는 40여 차례의 사직서를 써야만 했다.


1570,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글을 보며 섬세하고 인간적인 대학자의 삶을 민낯으로 받아들였다. 조그만 비석 앞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자신이 지은 글만을 새기라고 유언했다.

 

나면서 어리석고/자라서는 병도 많아/중간에 어찌하다 학문을 즐겼는데/만년에는 어찌하여 벼슬을 받았던고!/학문을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벼슬은 마다해도 더욱더 주어졌네/나가서는 넘어지고/물러서서는 곧게 감추니/나라 은혜 부끄럽고/성현 말씀 두렵구나 (‧‧‧‧) 조화타고 돌아가니/무얼 다시 구하랴

 

하늘의 별처럼 고택들이 즐비한 안동이다. 그중에서도 고성이씨 종택,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삶이 전해지는 임청각은 별중의 별이다. 500년 전통의 고고함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담대한 역사가 온전히 살아있다. 답사객 20여명은 엄정한 역사 속에 들어온 흥분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5개의 마당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시공간의 여백미에 감탄한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군자정에 모였다. “이 참에 밤 마실 가볼까요?”라는 누군가의 제안에 아이들이 먼저 반응했다.


산책의 기대로 마음이 설레어 잠에서 떨쳐 일어나지 않는다면..” <월든> 숲속을 기억하는 소로의 감정을 안동에서 재대로 느꼈다. 안개 자욱한 낙동강과 이슬 듬뿍 머금은 월정교를 건너본 우리들은 말할 수 있다. 안동의 답사는 낮이 아니라 밤이 있어 더욱 빛났다라고.


전탑은 안동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보물이다. 안동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탑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그중에서 법흥동 7층 전탑의 안쓰러운 사연은 현재진행이다. 오래된 절은 새로운 권력자였던 양반들에게 내어주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17.2미터의 거대하고 웅장한 탑은 어찌하지 못했기에 살아남았다. 총칼을 앞세운 제국은 고택을 헐어내고 철길을 만들었다. 일제가 놓은 중앙선 철길 위로 굉음을 내는 기차는 아직도 달린다. 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팔부중상은 처음부터 씩씩했다. 20세기의 호모 사피엔스들은 그 위에다 시멘트를 발랐다. 철도는 철거하겠지만 시멘트로 땜질한 기단은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안동은, 눈부신 초록 사이로 속살 드러낸 10리의 흙길이 정겨운 곳이다. 발병도 나지 않는 여름의 흙은 부드럽고 강력하다. 굳은 살 박힌 듯 단단한 흙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낙동강과 병산을 마주보고 있는 병산서원 강당에 올라서야 하늘을 보았다. 땅과 하늘사이에 보이는 것은 병산서원 만대루 뿐이었다. 200여명을 수용한 만대루에서는 열띤 토론이 있었으리라. ()이 없는 강당이다. 한담(閑談)이나 나누기 위해 지은 누마루가 아니다. 주변의 경관을 배경으로 잡지 않고 끌어 안은 건물 배치다. 다양한 생각을 공유하기 위한 인문학적인 공간 활용의 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은 병산서원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유성룡의 생각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서원이었음을…….


아름다운 사람들이 안동에는 많다. 살길과 죽을 길을 나누지 않고, 독립의 외길로 달려간 이육사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은 이육사가 남겨준 외길덕분이다. 아름다웠기에 강했던 사람, 아름다웠기에 부러지지 않은 사람, 이육사가 그리운 칠월이다.

 

내 고장 七月/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먼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그 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은 함뿍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변하지 않아서 위대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지금 안동에 가보자.

 





오룡(오룡 인문학 연구소 소장, 평생학습교육연구소 대표)<용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