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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사람

이석호 문학박사 족보연구가 연세대 명예교수

"평생 수집한 족보자료 박물관 기증 소망"


족보연구가 연세대 명예교수 이석호 문학박사


용인 원삼면서 태어나 태성중 거쳐 서울대 졸업

학자의 길 마치고 못다한 숙원 족보학 연구매진

역사 기초는 족보. . . 지금도 사재털어 자료수집

용인시 기증의사. . . '시립구봉박물관' 결실 기대


  





가지고 있는 족보, 간찰 자료와 박물관을 지을 땅도 줄 테니 용인시에서 족보박물관을 지으라는 거에요.”


평생을 수집해온 족보 등 귀한 자료를 용인시에 기증할 의사를 밝히고 있는 족보연구가 이석호 박사(86·연세대명예교수)는 마음이 바쁘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니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이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조급증이 생긴다.


원삼면 구봉산에서 태어났으니 호인 '구봉'을 박물관 명칭에 넣어주면 더 바랄게 없단다. 용인시립구봉박물관. 구봉산은 용인의 산이니 개인의 호라 해도 일반인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박물관의 이름. 장기 기증까지 신청해 놓은 상태여서 욕심 한 톨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벗어 놓을 요량이다.


족보는 오래전부터 사서 모으다가 지난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당연히 요즘도 사서 모으고 있는데, 택배기사들이 죽을 맛이다. 수백그람씩 하는 족보가 일주일에 서너 차례, 한 달이면 십여 차례씩 온다. 서울에 있는 고서점이나 헌책방 같은데서 새로운 족보가 입수되면 어김없이 이 박사에게 급전을 친다.


요즘 사들인 족보를 가지고 이 박사가 하는 일이라곤 도서대장을 만드는 일이다. 어디서 얼마주고 샀는지 책 뒤에 적어 장서인 찍어서 분류해 놓는 정도다.


한국족보사 내지 족보학을 저술 하려고 맘 먹은 때가 있었지. 벌써 20년이 넘었는데 아직 못했어.”


연세대에 몸담으면서 저술한 저서며 번역서가 수두룩한데, 오히려 정년을 하고 나니 뭐가 그리 바쁜지 앉아 있을 새가 없다.


입만 떠들고 글자를 안 썼어. 문자의 힘이 언어의 힘보다 강해. 일기 외에는 못 쓸 때가 많아.”


용인문화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글방을 하는 것을 비롯해 이것저것, 이리저리 할 일, 다닐 곳이 너무 많다.


이석호 박사는 용인에서는 태성중학교까지 마쳤고, 당시 태성고가 없던 시절인데다 피란 중에 수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친 그는 지난 1974년에 연세대에 중국문학과를 처음 만들었다. 당대에는 참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KBS MBC 라디오 등에서 명심보감 등을 2년여씩이나 강의하다보니 이곳저곳서 나를 환영했지.”


말이 막힘이 없고 빠르고 유창한데, 위트까지 넘치는 언변으로 좌중을 즐겁게 해주는 이 박사는 그러나 요즘 정신이 흐릿하단다.


지금은 정신이 흐릿해서 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어.”


정신이 흐릿하다는 것은 어쩌면 핑계라고 할까. 그는 여전히 총명하고 기억이 또렷해서 구석구석 시시콜콜 역사면 역사, 족보면 족보 기억하지 못하는 게 없다.


그동안 중국문학 관련한 서적 1만권은 연세대에 기증해 이석호 기증관이 있다.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이규태씨가 9000권 기증해서 나란히 도서관에 책이 꽂혀있다.


지난 2002년에 심장수술을 할 당시만 해도 몸이 너무 나빠서 장례 준비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회복돼서 어느 때보다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지낸다. 건강이 살아나면서 학문에 대한 욕심도 살아났지만 몸과 정신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란다.


간찰은 70년대부터 모으기 시작해 귀한 것들이 꽤 있다. 요즘은 족보니 관찰이니 모으는 사람이 드물어 더욱 귀중한 학술 자료가 되고 있다.


젊은 시절, 당시는 중국문학 전공자들의 대만 유학시절이었음에도 그는 살림이 빠듯해 유학을 갈 수 없었다. 자연히 중국문학보다는 한문학을 하다가 역사와 족보까지 관심을 갖게 됐다. “현재 우리나라의 족보학 연구는 문제점이 많아요. 족보가 왜 중요하냐하면, 생선의 뼈가 역사라치면 여기에 힘줄과 살이 붙어야 온전한 생선이고 역사라는 거에요. 뼈가 있으면 일단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안되요. 역사를 온전히 살리는 게 바로 족보에요.”


이 박사는 족보의 중요성을 생선에 비유하면서 족보는 기초적인 역사서라고 강조한다. 즉 역사의 기초가 족보라는 것이다.


수집품 중에 서울 창전동 광흥창에서 나눠준 최철희 녹표가 있다. 녹표에는 쌀 10말과 콩 닷 말을 춘하추동 네 번 준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요즘말로 월급명세서다. 이 박사는 하루 종일 족보를 뒤져 최철희가 수성최씨로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운 공신 최웅일의 5대손으로서 5대째 녹봉을 받고 있다는 내용을 밝혀냈다.


진리의 발견이지.”


백발의 노인이 여전히 진리, 진리 하면서 진리의 발견에 들뜨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젊은 시절의 그의 열정을 고스란히 읽어낼 수가 있다.


올해 말에 구봉 한시집이 나온다. 여기에는 그의 일대기를 지은 1650자 한시가 실린다. 가장 긴 시가 굴원의 이소경으로 2611자이다. 동명왕편을 지은 이규보는 1400자다. 이 박사는 자신의 어린시절부터 평생의 삶을 기록해 아력행(我歷行)’이라는 장시를 지었다.


시 짓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시의 운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1997년 정년퇴직을 하면서 거의 일년여에 거쳐 써내려간 한시다.


지난달 27일 시민들의 높은 호응 속에 막을 내린 용인시민 소장 문화재전에도 녹표, 도암간찰, 남구만 상소문 등 그의 귀중한 소장품들이 전시돼 전시의 격을 높였다는 찬사를 들었다.


족보박물관을 이루고픈 그의 꿈이 하루 빨리 이뤄져 박물관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역사에 눈을 뜨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