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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 김종경 칼럼
용인이 낳은 학자 ‘유희’ 연구에 적극 나서야

 

[용인신문] 유희(1773~1837)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재야학자로 용인, 모현에서 태어났다. 유희는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문통(文通)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용인시는 서파 유희의 모친인 사주당 이씨가 남긴 ‘태교신기’에 따라 용인을 태교 신도시로 지정하고 다양한 사업을 벌였으나 시장이 바뀌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용인시는 지난해 문화도시 지정에서 탈락하였다. 탈락 사유는 아마도 문화도시로 지정될 소프트웨어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용인은 조선조부터 유명한 인물들이 잠시 살거나 사후에 유택(幽宅)을 마련한 대표적인 고장이다. 대표적으로 포은 정몽주, 조광조, 남구만 선생이 있다. 정몽주 조광조 남구만은 용인 땅에 묻히거나 잠시 살았지만 용인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반면 유희는 용인에서 태어나고 용인에 묻혔다.

 

유희는 다산 정약용(1762~1836)과 동시대 인물이다. 정약용이 조정에 출사하여 이름을 날렸다면 유희는 18세에 향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포기하고 재야에 묻혀 학문을 연구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편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2012년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다산 정약용에 대한 연구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반면에 서파 유희에 대한 국가차원의 지원은 지극히 미미했다. 유희는 다산 정약용에 비견할 수 있는 재야학자였다. 그가 저술한 문통은 의술, 천문지리학, 기하학, 언문학, 생물학, 철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실학(實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희의 위대함은 그가 언문으로된 ‘언문지’를 남겨 당시에 천대받았던 한글 연구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이다. 다산 정약용은 500여 편의 방대한 저작을 남겼고 그중에 농사기술에 관련된 저술도 상당하나 아쉽게도 모두 한자로 기록되어 농민이 보고 이해할 수 없었다. 언문도 모르는 데 어려운 한자로 기록된 농사 관련 서적을 당사자인 농민이 이해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산 정약용이 농사 관련 저술을 언문으로 남기고 조정에서 농사 서적을 대부분이 농민인 백성에게 보급했다면 조선조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당대의 실학자를 대표하던 다산 정약용 선생조차 한자를 사대부의 전유물로 여겼다.

 

조선 조정과 실학자들이 한자로 된 저술만 고집한 것은 백성이 글을 알면 지배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한국 최초의 국어학자인 유희 선생은 백성이 글을 알기를 진정으로 원했다. 그래서 언문으로 기록된 저서를 남긴 것이다. 용인시는 유희 선생의 저서를 연구하고 재조명하는 것으로 문화도시의 첫발을 내딛기를 바란다. 그러면 반드시 문화도시로 지정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