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천재 집안… 시가비 눈길

2021.02.01 10:36:03

2. 허씨 5문장

 

 

용인향토문화지킴이 대표와 용인문화원장을 지냈던 박용익 원장이 생전에 탁본한 허난설헌 친필(맨 아래)과 
허난설헌 시비.

 

원삼면에 허엽·허성·허봉·허난설헌·허균 혼이 깃들다

 

[용인신문] 초당 두부를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강릉의 맑은 물로 두부를 만든 초당 허엽(1517~1580)을 비롯해 그의 아들 허성(1548~1612), 허봉(1551~1588), 딸 허난설헌(1563~1589), 막내 아들 허균(1569~1618)에 이르는 가족 모두가 조선 당대의 명 문장가로서 세상에서는 이들 소문난 천재 집안을 칭송했다.

 

이들 허씨 5문장이 용인 처인구 원삼면 맹리 한 자리에 모셔져 있다.

 

원삼면 맹리 일대는 양천 허씨가 입향 해 450여년 이상 세거하고 있는 동족촌으로 맹골과 능안마을은 허균과 허씨 5문장이 있는 세장지로 유명하다. 백암 방면으로 향하는 1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미평리약사여래입상이 있는 미륵뜰과 마주하고 있는 건너편 쪽 마을이다.

 

5문장을 한 자리에서 대할 수 있다는 것이 엄청 흥분되는 일이지만 비운의 천재 집안이라는 점에서는 숙연해질 뿐이다. 원래 경기도 시흥군 서초리(현 서울시 서초동)에 있던 묘역이 경부고속도로 개설공사로 인해 1968년 초당 허엽 선생의 유허지인 이곳으로 이전했다.

 

이곳 묘역에는 묘를 이장한 천봉 기념비를 비롯해 허엽 신도비, 허난설헌 시가비 등이 세워져 있다.

 

특히 허엽 비문은 조선 선조대의 명필가였던 석봉 한호가 썼다. 한석봉은 명나라 명필가들이 왕희지, 안진경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했고, 엄주 왕세정은 “성난 사자가 바위를 갉아내고 목마른 천리마가 내로 달리는 것과 같이 힘차다”고 했다. 선조는 그의 글을 항상 벽에 걸어두고 감상했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우러 왔던 제독 이여송도 한석봉에게 친필을 얻어갔다고 전한다. 당시 중국식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깨뜨리고 석봉류의 호쾌하고 강건한 필법을 창안해 낸 석봉의 정교한 글씨체를 감상할 수 있다.

 

이 비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선조 15년(1582)에 세워진 것으로 금석문집에 기록돼 있다.

 

이곳에는 허균의 누나이자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인 허난설헌의 시가비가 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안동 김씨 선영에 있다. 시가비는 1969년 6월 1일 국어국문학회에서 건립했다. 좌측 상단에 한견고인서(閒見古人書), 즉 “한가로울 때에는 옛 사람들의 글을 읽는다”라고 쓴 허난설헌의 친필을 새겨 놓았다. 뒤편에는 감우感優(느낀대로 노래함) 연시의 첫 연을 새겼다.

 

난설헌은 김성립과 결혼해 남존여비의 세상에서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 중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했다. 수많은 시를 남겼으나 유언에 의해 모두 태웠다. 다행히 동생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게 시 일부를 주어 명나라에서 213수의 '난설허집'이 간행돼 격찬을 받았고 일본에까지 널리 전파돼 당시 세계적인 여성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중국의 여성 시인 허경란이 난설헌을 흠모해 호를 소설헌으로 짓고 자신도 난설헌처럼 죽고자 했으나 27세에 죽지 않자 크게 실망하고 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됐다고 전한다.

 

난설헌의 ‘몽유광상산시서’에서 “연꽃 스물일곱송이 붉에 떨어지니”라며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기도 했다. 동생 허균이 삼구홍타(三九紅墮)라고 주석한 대로 실제 난설헌은 27세를 맞은 1589년 3월 19일, 아무런 병도 없던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목욕재개하고 옷을 갈아입더니 집안 사람들에게 오늘이 바로 3‧9의 수(3×9=27)에 해당하니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홍길동전을 지은 비운의 천재 허균의 묘는 그가 능지처참을 당했기에 시신이 없는 허묘다. 호는 교산으로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하는 다수의 글을 남겼으며 소설, 한시, 문학비평 등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반역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극형인 능지처첨을 당했다. 역적으로 형을 당했기 때문에 저작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일부만 남아 전해진다.

 

부친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고, 허균의 이복형 허성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린 뒤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냈다. 동복형인 하곡 허봉은 허난설헌과 허균의 정신적, 학문적 스승으로 학문이 높았던 인물이다. 동인의 선봉이 돼 율곡 이이의 근무태도를 규탄했다가 역으로 유배당한 뒤 벼슬을 버리고 방랑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사망했다.

박숙현 기자 europa@yong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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